“성경을 해석할 때 어떤 입장에서 봐야 할까요. 우선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지난 12일 오후 4시 서울 광장동 장로회신학대 주기철기념관 702호. 머리가 반쯤 벗겨진 백발의 교수가 마이크와 분필을 쥐고 ‘열강’을 펼치는 중이었다.


수강생 20여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는 박창환 전 장신대 총장.


이 학교를 졸업한 뒤 교수, 수장까지 거친 그가 모교 강단에 교수 이름으로 다시 서는 건 꼭 25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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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환 전 장신대 총장이 강의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가 ‘240317’로 시작되는 박 교수의 한국 나이는 아흔이다.


이 나이에 정식 과목을 맡아 한 학기 동안 강의한 사례는 장신대 개교 112년만에 그가 처음이다.


‘구순’의 은퇴 교수가 새파란 신학생들 앞에 다시 나설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장신대의 한 교수는 “개교 100년이 넘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대로서 상징이 될만한 시니어(원로)급 교수가 계시면 좋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왔다”면서 “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잇는 든든한 원로급 선배로 박 교수님을 모시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박 교수는 초빙교수를 제의해온 모교 측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머물고 있던 미국 시카고의 아들(박선진 목사) 집을 떠나 지난 1일 귀국, 5일부터 첫 강의를 시작했다. 강좌 제목은 ‘신약성경신학’으로 매주 3시간짜리다.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신약성경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지금 이 시대에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연구하는 겁니다.”


박 교수는 1948년 장신대를 졸업하자마자 모교 전임강사로 시작해 교수와 교무·교학처장, 대학원장, 13대 총장까지 지낸 뒤 65세 때인 88년 은퇴했다.


한국 교계에서 ‘신약의 대가’로 꼽히는 그는 장신대 재직 시절, 대한성서공회 성서번역관으로 활동하며 우리말 성서 번역 및 보급에 디딤돌을 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앞서 장로교단의 분열(통합-합동)로 신학교마저 갈라지던 1960년 10월, 부교수 신분이었던 그는 사비를 털어 한 교직원이 보관하고 있던 학적부를 찾아온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활동은 현직에서 물러난 ‘인생 2막’에서 더 빛이 난다.


 은퇴하자마자 미국 맥코믹 신학교 교수(2년)와 나성 장로교신학대 대학원장(3년), 한일장신대 교수(2년), 모스크바 장신대 학장(5년) 등으로 세계를 누비며 신학도들을 가르쳐왔다.


최근 3년(2009∼2011)은 남미 니카라과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문서 사역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루터교에서 나온 베델성서연구 외에 전무하다시피한 한국의 평신도 성경교재(창세기∼요한계시록)를 20년 가까이 작업해 완간했다.


현장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들을 위한 ‘성경해석방법론’ 강의집을 12년에 걸쳐 내놓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르치는 일을 사명으로 주셨기 때문에 그저 충실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에요.”
한평생 신학을 가르쳐온 신학 교수의 고민 한가운데엔 여전히 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들이 하나님을 외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강조한 말이 있었어요.
‘체덱(공의)’과 ‘미슈파트(정의)’였습니다. 한마디로 ‘진실하고 옳게 살자’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목회자들이 신학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알고 바로 살고 바로 전하는 것’. 이것이 목회자들의 기본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였던 조부(박태로 목사)와 순교한 부친(박경구 목사)에 이어 아들(박호진·선진 목사)과 손자(박범 목사)에 이르기까지 100년 동안 ‘5대 목회자’ 가정을 이룬 박 교수는 목회자의 사명을 묵묵히 지켜오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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