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기타 세션' 함춘호의 음악인생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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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춘호가 "가장 자주 연주하는 국산 수제기타"라고 소개한 자신의 클래식 기타를 감싸 안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많은 음들을 기타로 얼마나 빨리 칠 수 있느냐보다는 1분에 한 음을 치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연주가 잘하는 연주"라고 말했다.


‘나훈아, 송창식, 조용필, 전인권, 이승철, 김현철, 김건모, 신승훈, 비…’.
국내 최고의 ‘기타 세션’ 함춘호(51)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 톱 가수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가 외국에 나가 있으면 음반 제작이 차질을 빚는다는 말까지 돌았었다.
세션이란 정식 멤버가 아니라 공연이나 음반 녹음 시 일시적으로 함께 연주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함춘호는 최근 서울 남산의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의 31년 음악 인생과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풀어놨다.
그가 음악적 자양분을 빨아들인 곳은 교회였다. “1973년은 빌리 그래함 목사가 여의도에서 100만 성도를 모아놓고 부흥집회를 했던 때예요.
한국 기독교가 부흥했던 당시 청년들은 영적으로 성장했고 우리 음악은 기독음악을 통해 서양 대중음악과 만날 수 있었어요.
중학교 1학년이던 저는 YWCA 등 기독단체의 집회에 가서 새로운 복음성가를 배웠습니다.”
1주일 기타를 먼저 배운 형의 어깨너머로 기타를 배운 함춘호가 유일하게 솜씨를 뽐낼 수 있는 무대가 교회였다.
“소풍날 장기자랑에서 기타 치는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에는 비가 와서 못했고 3학년 땐 학교와 같은 재단인 고교 건물에 불이 나서 소풍이 취소됐어요(웃음).”
서울 구파발 농원마당 한 가운데 있는 나무 높이 정도의 나지막한 교회에서 그는 형과 함께 기타를 치며 찬양을 했다.
함춘호는 “기타치고 노래할 줄 아는 아주 작은 재주를 극대화시켜 준 교회는 나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아내를 만난 것도 이 교회에서다. 말수가 적었던 중학생 함춘호는 서울 구파발 성결교회에서 지금의 아내 원유미(49)씨를 처음 만났다.
기타 연습에 미쳐 있던 함춘호에게 공부는 뒷전이었다. 예원중학교 성악과에 다닌 그는 당시 학교에 내야 할 레슨비로 기타를 샀다.
서대문 악기상에서 5000원짜리 기타를 산 뒤 수업에 자주 빠져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음반을 전축 위에 올려놓고 판 표면이 일어날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어요.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1960년대 인기를 끈 미국의 포크 음악 그룹)’ 스타일의 음악을 많이 카피했습니다.”
고교 시절 함춘호는 록 밴드를 결성해 선일여고 등 여고 축제 무대에서 ‘나 어떡해’ 등 대학가요제 곡들을 자주 연주했지만 대학 진학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유명한 록 밴드가 있는 대학에 전화해 ‘기타 특기생’으로 진학할 수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저희가 기타를 쳐서 홍대에 가려는데요. 왜 블랙테트라(홍대 록 밴드)도 있잖아요.”(함춘호)
“들어와서 밴드를 할 수는 있어도 기타를 쳐서 들어오는 과는 없어요.”(대학 교직원)
대학 입학을 포기한 함춘호는 79년 기독교 방송 라디오 디제이로 활동한 가수 이문세의 소개로 서울 무교동 라이브 카페 ‘꽃잎’에서 한 달에 2만원을 받는 ‘노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이문세와 고교 동창인 그의 형이 다리를 놔준 것. 당시 꽃잎 아래층 통기타 카페 ‘타임’에선 신촌블루스에서 노래를 했던 정서용,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오종수. 남궁옥분이 노래를 했다.
함춘호는 라이브 카페에서 차차 이름이 알려질 무렵 전인권을 만났다. “종로 고고장에서 공연을 하던 인권이형이 꽃잎에 와서 제가 노래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때 20대 인권이형은 비쩍 말랐고 긴 머리에 잠자리 안경을 쓰고 있었죠. 슬리퍼를 끌고 와서는 ‘어, 진짜 노래 잘 하네요’라고 칭찬을 해줬어요.”
전인권의 골방에서 의기투합한 둘은 80년 후반 종로 통기타 카페에서 록 음악을 접목한 연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이름이 알려진 가수들은 대략 월 15만원을 받고 카페에서 노래를 했다.
 전인권과 함께 활동을 시작한 이후 함춘호의 월수입은 20만원까지 뛰었다.
‘시인과 촌장’ 하덕규도 그를 찾아왔다. 둘은 86년까지 활동하면서 ‘사랑일기’ ‘푸른돛’ ‘풍경’ 등 서정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작품을 남겼다.
함춘호에게 송창식은 우상이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기타 코드를 공부했다. “‘강변에서’ ‘사랑이야’ 등 송창식 선배 노래 대부분을 연습했어요. 창식이형은 묘한 느낌의 코드를 자주 썼고, 기타를 치는 부드러운 손목 움직임이 정말로 멋져서 따라 치게 됐습니다.”
2000년 송창식·윤형주·김세환·양희은이 참여한 ‘포크 빅4 콘서트’의 밴드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함춘호는 자신의 중·고교 시절 우상이던 송창식과 직접 인연을 맺게 됐다.
이후 송창식과 라이브 무대에 자주 올랐던 함춘호는 지난해 ‘세시봉 3인방’ 송창식·윤형주·김세환과 함께 전국 25개 도시를 돌며 공연했다.
“사람들은 (기인 같은) ‘창식이형을 어떻게 맞춰줘’라고 하는데 저는 창식이형 노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거의 모든 곡들의 느낌까지 알기 때문에 (송창식이) 이상한 길로 가도 따라갈 수 있어요.
창식이형과 함께 공연하면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86년 결혼한 함춘호는 음악인으로서 바른 길을 걸어올 수 있기까지 아내의 역할이 컸다고 설명했다.
20대 초반 지방 밤업소를 전전하며 유흥에 빠져 있던 그에게 ‘나이트클럽은 악의 온상’이라며 믿음의 길로 다시 이끌어준 것도 아내였다.
현재 서울 정릉동 벧엘교회에 다니는 함춘호는 신실한 크리스천으로서 나눔을 실천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기독음악 연주인 20여명이 최근 베트남에 선교 활동을 하러 갔어요. 베트남은 겉으로 종교 자유가 있어 보이지만 기독교인이 탄압을 받는 분위기가 남아 있습니다.
현지 한 교회에서 큰 소리로 연주하며 찬양을 했는데 살아 있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그는 자신의 창작곡들로 채워질 새 앨범을 구상하고 있다. “2007년에 낸 찬송가 연주 앨범 ‘콰이어트 타임(Quiet Time)’이
‘하나님께 제 첫 앨범을 바칩니다. 이제 제가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는 의미였다면 이번 앨범은 세상과 좀 더 소통할 수 있는 편안한 곡들로 채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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