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패션디자이너 최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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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패션계의 거장 최복호 디장이너는 경북 청도군 각북면에 갤러리, 공연장, 카페, 셀렉트숍 네 가지 테마가 있는 패션문화연구소를 건립하고 문화독립군으로 살아가고 있다. 연구소내 갤러리에서 작룸을 감상하고 있는 최 디자이너.


   패션디자이너 최복호(64)의 삶은 유년시절부터 초등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예배당이란 공간에서 시작됐다.
그의 외할아버지도 외삼촌도 목회자였다. 예배당은 그의 삶의 터전이요. 꿈의 공간이었다.
그의 인성이 자랐고 다양한 축제와 행사를 통해 지혜가 꽃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예배당을 등졌다.
그리고 40년이 흘러 ‘돌아온 탕자’처럼 신앙으로 돌아왔다. 회개하며 살겠다고 작은 예배당을 신축해 어머니(86세)에게 바쳤다. 무엇보다 그가 오늘 ‘문화의 독립군’으로 살아가게 된 에너지는 어머니 소영희 여사의 기도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희예배당’이 탄생했다. 그의 라이프 스토리가 무척 궁금했다. 지난 15일 차로 꼬박 4시간40분이 걸리는 경북 청도군 각북면으로 달려갔다.

양장점이 산으로 간 이유
백발을 질끈 묶은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 FUN&樂’ 최 대표가 기자를 반겼다. 그의 강렬한 색깔 바지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초록색 바지가 예쁘다는 기자의 말에 쑥스러운 듯 환한 미소로 그가 화답했다.
“하하, 제가 이런 색 바지를 입은 게 처음이라. 괜찮아요? 색을 다루는 사람인데도….”
청도가 고향이냐고 물었다. 고향은 청도랑 전혀 상관없는 구미 선산이라고 했다. 창작은 삶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그는 산실이 필요했다.
청도는 작품의 영감을 돕는 인큐베이터 기능을 한다고 했다. 도심보다 자연의 풍광이 펼쳐진 곳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활동을 한다. 그래서 회사는 대구, 연구는 청도에서 이뤄진다.
“주로 색을 다루는 작업을 많이 하잖아요. 색 작업은 신의 창조물에서 영감을 발췌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느끼고 발현하고 제작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30년 전부터 했습니다.”
오랫동안 산속에 양장점을 짓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구체적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와서 즐기는 ‘펀 앤드 락(FUN&樂)’을 할 수 있는 곳의 필요성도 느꼈다.
도시에 살면서도 그런 곳에 적응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경북 고령에 주말 주택을 구입, 16년을 살았다. 주로 주말에 부부파티를 했다. 그 속에 어릴 때 경험했던 교회 속 교제가 있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형식에 있지 않고 교제 속에 있다고 생각했고 말씀이 없을 뿐이지 서로 교감하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교회라고 느끼고 파티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출발했고 생각을 발전시켜 연구소로 구체화한 것입니다.”
사과밭 4628㎡(1400평)를 사들여 예술이 있는 전시관·갤러리, 공연할 수 있는 공연장, 담론할 수 있는 카페, 쇼핑할 수 있는 멀티숍으로 4개의 테마공간을 구성했다.
연구소는 최 대표의 나이가 60이 넘은 2008년 완성됐다. 공연장에서는 전유성 잡담쇼, 클래식 공연, 김도향 초청콘서트, 가야금 연주회 등 다양한 공연이 2개월에 한 번씩 열린다.
그는 자신의 매뉴얼을 실험하고 미술이 인간 삶에 끼치는 영향, 공연이 삶에 끼치는 영향, 쇼핑의 태도와 즐거움, 사람의 만남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원류·속성을 느끼며 질펀하게 살고 있다고 자랑했다.
청도에 살면서 그가 거둔 시너지 효과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높여줬다. 작품세계도 공고해지고 완성도도 높아졌다. 그렇게 해서 세계시장에 꾸준히 도전했고 성공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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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소 내 미니 예배당 앞에서 기도하는 최 디자이너.

목회자 꿈꾸던 아이, 예배당 버리다
외할버지, 외삼촌도 목회자이고 어머니도 교회 여전도사로 20년간 봉직했다. 그 역시 목회를 하려고 했으나 도중하차했다. 그리고 예배당을 버렸다. 무예배당주의자가 됐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문화 속에 살면서 바라본 교회문화 뒤편의 어두운 부분이 어린 그를 회의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깨끗하고 맑은 목회자가 되려고 했는데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신의 부름을 받고 그렇게 태어나야 성직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사택에 살면서 인간적인 교회의 부정적인 것, 막말하는 부흥강사가 어린 나이에 충격이었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1969년 “앙드레 김 선생처럼 디자인을 해보라”는 목사의 권유가 있었다.
성탄절 등에 교회를 장식하는 그의 솜씨가 남달랐고 고교 때 YMCA 동아리 활동을 통해 전국연극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재능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생소했지만 새로운 꿈을 꾸었다.
군에 가게 됐다. 독자라 6개월 만에 나올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끝까지 군 생활을 희망해 두 달 만에 군종과로 갔다. 어머니는 제대하면 목사가 될 줄 아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군에서 예배만 보고 나면 여자 다리를 그렸다. 제대 후 집에 돌아오자 가출해 서울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다.
이대입구에서 디자이너로 자리 잡을 무렵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대구로 올 수밖에 없었다. 대구에서 양장점을 오픈했다. 한창 잘 나갈 때 양장점에 불이 났다. 재기불능 상태였다.
시골에 숨어 살면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거듭남을 선물로 받았다. 77년 7월 구원의 확신이 왔다. 모든 업을 버리고 2년을 말씀 속에 살았다. 성경과의 대화가 시작됐다.
외삼촌을 찾아가 다시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외삼촌은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와 네 달란트는 다르다. 한 번 더 생각하라”고 반대했다. 외삼촌의 뜻을 받아들였다.
양장점을 다시 열었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5평 가게에서 하루 가봉만 50벌. 그렇게 성장했다.
“말씀을 깨닫고 난 뒤 교만해지기보다 진정한 자유함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복음의 관건입니다. 하나님이 다 이뤄놓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면 되는 거였습니다.”
지금까지 기도를 못했다. 예배당을 거부하면서도 매일 예배당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미니 예배당을 지었다. 어머니가 예배당에 와 보시고 아주 기뻐하셨다. 형식을 싫어하지만 예배당을 지으니까 기도가 나왔다. 이제는 참기도를 드리고 있다. 더 이상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 이뤄놓으신 거 제가 찾을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
미니 예배당을 건축한 뒤 신앙 없는 영혼들의 공동체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색·스타일은 소통이다
“패션은 육체에 입혀지는 게 아니라 영혼에 입혀지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패션 철학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든 옷을 걸친 사람이 만족해야 하고 나아가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옷이 고객과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을 소통이라고 말한다.
“색은 소통입니다. 스타일도 소통입니다. 소통되지 않고 소통의 선을 넘어서 인간의 가치, 물질적 가치, 권력의 가치로 오버랩되면 사치입니다.”
그는 대구의 대표 디자이너로 내수시장과 해외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2010년에는 온라인 시장에 진출, 롯데홈쇼핑에 론칭하며 전년에 비해 50%의 신장을 이끌어냈다. 해외시장에는 옷이 아닌 디자인을 판매하며 ‘가치산업’ 수출에 일익을 담당했다.
지난 5일에는 35년간 섬유패션업계의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와 노력으로 문화 마케팅 및 감성 경영 분야에서 국가 패션문화 경쟁력 제고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을 얘기했다. “기회가 되면 목사 안수를 받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회개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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