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박동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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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한 선교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아이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현장 사역을 펼치고 있다. 50세에 선교지로 떠난 그는 아이티에 푸르티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아이티에서 사역 중인 박동한(55) 선교사는 젊은 시절부터 ‘민족 복음화의 환상’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다.
그에게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창립한 고 김준곤 목사와 이랜드 박성수 회장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고려대 CCC대표와 서울지구 CCC 학생 대표 등을 역임한 그에게 고 김 목사가 주창한 “민족의 가슴 속에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어 이 땅에 푸르디푸른 그리스도 예수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민족복음화의 선언’은 가슴 깊이 자리 잡았다. 학생 시절 박 선교사는 평생 그 선언을 삶 속에서 실천 하겠다고 결심했다. ‘전 민족의 입체적 복음화’야말로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됐다.
대학 졸업 후 박 선교사는 이랜드에 입사했다.
재무본부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다. 거기서 그는 박성수 회장으로부터 ‘믿음의 기업’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자신이 거하는 일터가 소명과 헌신의 자리임을 깨달았다.
이랜드에서 그는 비지니스(Business)와 선교사(미션너리·Missionary)의 합성어인 ‘비지너리’로 살 것을 다짐했다.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서강대 경영전문대학원(MBA)에서도 공부했다.
이후 박 선교사는 벤처기업 대표 등을 거쳐 국제사랑의봉사단 사무총장과 단장을 역임했으며 이롬글로벌 대표이사 등도 지냈다.
국내의 대표적인 비지너리로서의 삶을 산 것이다.
2006년 7월에 그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남미 도미니카로 갔다.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보다 ‘래디컬 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고 싶었다.
직접 현장 선교사로서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기 원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현장에 나가고 싶었다. 50세에 인생의 대전환을 시도 한 것이다.
평생 비지너리의 삶을 살아온 그의 진가는 도미니카에서도 발휘됐다.
하나님은 그의 지난 삶의 경험을 그대로 사용하셨다.
박 선교사는 도미니카 제 2의 도시 산티아고에서 만성적자이던 크리스천 학교의 경영을 정상화시켰다. ‘비지너리’의 시각으로 주위를 바라보니 도처에 할 일이 넘쳤다. 도미니카의 인접국 아이티가 보였다. ‘진흙과자’를 먹고 있는 아이티 아이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때 박 선교사는 젊은 시절 지녔던 ‘민족 복음화의 환상’을 다시 생각했다. ‘그래, 저 아이들이야. 저 불쌍한 아이들을 아이티 민족 복음화의 기수로 삼아야 해.’ 아이티의 모든 사람들에게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어 그 땅에도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을 오게 하는데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
아이티에서는 적극적으로 학생 사역을 펼쳤다. 도미니카에서 온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CCC 형태의 순을 조직, 전도와 양육을 실시했다.
한 명으로 시작된 순 모임이 지금은 100여명 정도로 늘어났다.
그는 아이티 각 지역에 전 민족의 입체적 복음화를 추진할 비전센터를 30곳 정도 지을 계획으로 기도 중이다.
지난해 1월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이후에는 구제 사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회성이 아니라 아이티의 기독교 인프라가 강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한국과 미국, 남미 등을 연계한 구제사역을 펼치고 있다.
최근 아이티 선교 사역 확대를 위해 방한한 그는 “복음으로 무장된 한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서 “아이티의 ‘그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 한국교회가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박 선교사는 “지난 삶을 되돌아보니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의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면서 “젊은이들은 ‘세상 스펙’ 보다 ‘하늘의 스펙’을 쌓아나갈 때, 결국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알기 바란다”고 말했다.
아직도 청년이 기상이 보이는 박 선교사는 “어차피 우리 모두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이라면서 “청춘의 시기부터 각자 서 있는 장소에서 ‘래디컬 크리스천’의 삶을 포기하지 말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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