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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매일 아침 두 개의 계란을 깬다. 

후라이를 위해서다. 


아내와 나는 각자 출근하기 직전 아침마다 이 계란으로 필수 아미노산 영양보충을 한다. 

오트밀은 아내가 준비하고 계란은 내 몫이다. 


올리브 오일로 된 쿠킹 스프레이를 후라이팬 위에 뿌리고 후라이를 하고 남는 계란 껍질은 고스란히 모아두어야 한다. 


아내는 그걸 모아 뒷마당에 뿌린다. 

거름에 좋다고 어디서 들은 모양이다.


계란 후라이를 하며 가끔 옛 생각에 빠지곤 한다. 

어릴 적 나의 시골집에는 몇 마리의 닭이 있었다. 


암탉도 있고 수탉도 있었다. 


햇볕에 말리려고 멍석위에 펴 놓은 벼나 콩을 그 닭들이 쪼아 먹으면 밭에서 일하시던 어머니가 황급하게 들어와 공부하고 있던 나를 불러내어 닭을 쫓으라고 할 때 그 놈의 닭들이 웬수처럼 느껴졌다. 


“저것들을 그냥 . .” 


그러나 헛간에 하얀 계란을 낳고 울며 사라질 때는 어린마음에도 그 닭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지곤 했다.


어머니가 시장에 내다 팔기 때문에 계란은 국물도 없었지만 가끔 손님이 오는 날 우리 밥상엔 투가리에 담긴 계란찜이 특별메뉴로 등장하곤 했다.


전기가 없던 그 시절에 계란 후라이는 상상을 못했고 기껏해야 밥솥 한구석에 구겨박아 만드는 계란찜이 최고였다.


소풍을 가는 날에는 계란을 삶아 도시락에 챙겨주셨다.


큰 형이 입영영장을 받고 논산 훈련소로 향하던 아침에도 어머니는 삶은 계란을 챙겨주시는 걸 보았다.


 닭이 흔한 만큼 계란도 흔하긴 했지만 계란을 팔아 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흔한 만큼 풍부하진 못했다. 


추석이나 구정 때 말고는 고기반찬을 구경할 수 없던 나의 어린 시절 계란은 그나마 유일한 단백질 보충제였다.


신학교에 다닐 때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 수위 아저씨는 리어카에 점심 도시락을 싣고 학교로 배달해 왔다. 


신학교는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었지만 기숙사는 충정로에 있었다. 


약 3마일 길을 리어카를 밀고 그 수위아저씨가 학교에 도착하면 점심시간을 기다리던 50여명의 기숙사생들은 우루루 몰려들어 도시락하나씩을 받아 잔디밭에 앉아 점심을 때웠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그 도시락 뚜껑을 열면 쌀보다 보리가 더 많았다. 


입맛이 땡기지 않는 시커먼 보리밥 도시락. 그런데 그 절망의 도시락에도 희망은 있었다. 

바로 계란 후라이였다. 


시커먼 보리밥 위에 하얗게 빛나는 계란 후라이…


아아, 그것은 가난한 신학생들의 심신을 달래주는 맛있는 희망이었다.


1~2학년 저학년 학생들은 꼬박 앉아서 그 후라이를 반찬삼아 도시락을 끝내지만 도시락에 질린 상급생들은 차라리 라면으로 배를 채우겠다고 후라이만 딸랑 집어먹고 동네 라면집으로 튀던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부터 계란으로 몸보신 하던 버릇이 대학생활을 거쳐 이민 와서 드디어 메디케어 신청을 앞두고 있는 이 나이에도 계란은 나의 몸보신용으로 계속 애용되고 있다면 이건 은총이 아니고 무엇인가?


정유년은 닭의 해라고 한다. 


새해벽두부터 닭에 대한 유머가 카톡으로 유통되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닭은 코스닥, 제일 빠른 닭은 후다닥이라느니, 정신줄 놓은 닭은 헷가닥, 집안 망쳐먹은 닭은 쫄닥, 성질 급해 죽은 닭은 꼴까닥, 가장 천한 닭은 밑바닥 . . . 기발나게 유머러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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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닭이 계란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노벨 경제학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인종 안가리고 국경 안 따지고 빈부격차 안 따지고 평등하게 인류의 건강을 위해 헌신한 점을 고려한다면 노벨 평화상도 가능하다. 


계란뿐인가? 


닭이 없다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은 어디에 있고 ‘엘뽀요로코’가 탄생이나 했겠는가?


알을 낳아 계란으로 사람을 살리고, 죽어서는 육고기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그뿐인가? 


똥으로 이 세상 황무지 같은 땅을 기름지게 하고, 아내의 이론대로라면 계란껍질 마져 우리 집 뒷마당을 비옥하게 한다면 닭이야 말로 버릴게 하나도 없는 동물이다. 


그 많은 치킨 집 말고도 심지어 술안주로 닭발집까지 유행하고 있다니 닭이야 말로 인간을 위해 온 몸을 희생하기로 작심하고 창조된 동물이 아니던가?


닭이 울 때 비로소 자신의 나약함을 회개하고 위대한 주님의 사도로 거듭나게 했던 베드로의 회심사건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기독교 역사에도 크게 기여했던 닭, 그 닭의 해를 맞이했으니 닭 놓고 그냥 조크나 주고받지만 말고 한번 닭이 주는 교훈도 되새겨 보자. 


“아낌없이 주는 닭 … ”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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