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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욱 <바리톤>


글을 계속 이어가기에 앞서, 필자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하고, 성가대와 찬양팀 모두가 존속할 수 있는 교회환경을 만들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가 쓰는 글은 비판조의 경향이 강합니다. 잘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기에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잘못하는 것들, 피해왔던 것들, 잘 몰랐던 것들 다시 말해 말하기 불편했던 것들을 드러냄으로 현재의 문제를 보다 빨리 인식하고 옳은 방향으로 조금씩 수정해 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우주선을 발사하여 화성에 보냈답니다. 무시해도 될만한 아주 조그만 숫자의 오류가 결국은 우주선의 궤도를 바꾸어 폭파했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보다 심각한 일이 생긴 뒤 후회하실 분은 이런 글들을 무시하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전문가들이 보고 듣고 판단하여 조심스럽게 제시하는 이러한 글들을 많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행동은 하지 못한다고 해도 생각만이라도 조금 바꿔 주십시요. 그 생각 하나가 결국 교회 전체를 바꿀 날이 올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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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내면의 현상
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를 없애거나, 역할을 축소시키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은혜롭지 않다는 것이다.
성가대원들의 찬양 자체가 수준이 낮기 때문에 은혜롭지 않기도 하지만, 성가대원들의 행실로도 은혜롭지 않기도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성가대의 수준이 중요하지 않았던 시대를 우리는 이미 지나쳤다.
요즘의 아이돌 가수들을 보라. 그들은 데뷔하기 위해 길게는 7년여를 연습생으로 보내며 자신이 세상에 우뚝 서는 날을 모진 연습과 함께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데뷔를 한 가수들도 자신들의 노래 한 곡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하루에 7~8시간씩 - 게다가 무시무시한 다이어트까지 하면서 - 연습을 한다.
이렇게 세상에 나오는 음악들과 교회의 성가대를 비교해보라. 날 선 비평이긴 하지만 성가대의 수준은 세상의 음악에 비해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표면에 보이는 대로 성가대의 낮은 수준은 연습량의 부족 때문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모임을 폐하거나, 열심을 다하지 않는 현대 교회의 문화와 연관시키고 싶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게으름 때문이다. 일전에 한 대중가수가 말한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브리테인 갓 텔런트(Britain's Got Talent: 일반 대중이 오디션에 참가하여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실제 연예계의 메니져들이 스타를 발굴해내는 TV 프로그램.
한국에도 여러 프로그램이 있다)에 나와서 일약 스타가 된 수잔 보일이나, 폴 포츠는 그들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노래 속에는 그들의 어려웠던 삶이 들어 있었고, 그들은 그 부끄러운 자신의 삶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대중에게 보여줬으며, 대중들은 그들의 진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렬히 환영하는 것이다.
수잔 보일이나 폴 포츠가 정규음악대학을 졸업한 음악가였다면, 더 심하게 이야기해서 맹인가수 안드레아 보첼리가 장님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과연 지금과 같은 성공을 이룰수 있었을까? 필자는 이 이야기의 초점이 이들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성가대의 나갈 방향을 이들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성가대는 전문 음악인이 아니고, 아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역의 한 부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하나님을 매우 많이 사랑하는 그 백성중의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성가대가 전문합창단과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나이 60세가 넘은 장로님 목소리에서 파바로티 같은 황금빛 소리가 나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중은,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은 그들의 노래 속에서 진정성, 다시 말해 그들의 삶에서 풍겨져 나오는 인간미를 원하고 있다.
그들의 인생 속에서 빚어진 그릇이 질그릇이라고 하더라도, 그 삶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구별된 삶이었다면, 듣는 성도들은 눈물을 훔치며 들을 것이다.
세계 유수 콩쿨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는 성악가가 헌금 특송을 부른다면 성도들은 그의 목소리와 기술을 보며 환호할 것이지만, 60대의 어느 장로님이 헌금 특송을 한다면 게다가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안다면 그의 정성 어린 찬양에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게으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아무런 준비 없이 진정성 만을 가지고 무대에 선다면 대중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은혜로 찬양한다고 감동이 생길 수 있을까? 진정성이라는 것은 그들이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을 때, 빛이 나기 마련이다.
그들의 삶에 있어서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모여 연습하고 기도하며 주일 예배에 섰을 때, 그들이 부르는 찬양이 빛이 나기 마련이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노래 잘하니까, 오늘은 피곤하니까, 아무개 집사 장로 혹은 권사가 꼴보기 싫어서 등의 이유로 최선을 다하지 않고, 주일 예배에 성가대로 찬양할 때, 그 찬양이 은혜스러울 수 있을까?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어 보자. 살다 보니, 신앙의 깊이가 없다 보니, 그럴 수 있다고 하자. 아니, 그럴 수 있다.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세상과 하나님 둘 다 섬기는 것은 보통의 인내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다. 왜 나라고 그런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성가대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사역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당하기 어려웠던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고 세상의 구세주로 우뚝 선 분이다.
그 분은 우리에게 지금 가르치고 계신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막 8:34, 마 16:24, 눅 14:27) 하신다. 그 십자가는 결코 쉽지 않다. 성가대 사역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의 목표를 예수님을 닮는 삶이라고 정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이기고 승리하셨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 다음에 승리해야 한다는 것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의 무거움에 대해불평 불만을 토로하며 쌓아가는 것 보다는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승리를 바라보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불평 불만을 할 만한 시간이 있지 않다.
성가대의 게으름은 십자가에 대한 불충성이다. 물리적인 압박이나, 그들을 향한 비난이나 비판으로 성가대의 게으름은 끝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십자가 뒤에 있는 승리를 향해 나갈 수 있도록 삶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한 삶을 살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이 날선 검이 되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히 4:12)의 말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찬양이 듣는 성도들에게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찬양으로 들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게으른 성가대, 실력 없는 성가대, 다툼이 많은 성가대, 불평 불만이 많은 성가대를 변화시켜 온전한 사역자로 예배에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적인 성장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역사 안에 거하면서 영적으로 무장된 성가대는 어떤 문제가 닥쳐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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