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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나도 이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을 보고 자랐을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나는 어린이들은 A, B, C와 같은 영어 알파벳이나 1, 2, 3 과 같은 아라비아 숫자들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배운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지만 우리 집 두 아이들도 이 방송을 보며 컸다.


PBS에서 방영하는 어린이를 위한 텔레비전 교육 프로그램으로서 무대는 가상의 거리인 세서미 스트릿에서 전개된다.


인종차별이 한창이던 1969년 미국에서 처음 방송된 이래 지금까지 140개 이상의 국가와 지역에서 사랑받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 세서미 스트릿에는 쓰레기통에서 살고 있는 오스카 더 그라우치(Oscar the Grouch), 쿠키 몬스터(Cookie Monster), 엘모(Elmo), 빅 버드(Big Bird), 어니(Ernie)와 버트(Bert)등이 주요 캐럭터로 등장한다.


내년이면 50주년을 맞는 이 인형극프로그램엔 처음부터 흑인을 비롯 히스패닉, 아시안계가 함께 사는 거리로 만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인종의 다양성을 가르쳤다.


이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버락 오바마 흑인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전혀 이상한 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쓰레기통에 사는 오스카는 남을 험담하는 게 주특기다.


쿠키 몬스터는 쿠키만 보면 먹겠다고 거리를 난장판으로 만든다.


그래도 한숨은 내쉴 망정 서로 인내하고 관용을 베풀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서미 스트릿. . .


그래서 아이들로 하여금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는 아주 고마운 프로그램이다.
등장인물이 모두 유명한 캐랙터들이지만 역시 최고의 인기는 어니와 버트다.


이들은 세서미 스트릿 123번지 반지하에서 살고 있는 단짝 친구다.


둘 다 남자다. 그런데 성격은 완전 180도 다르다.


버트는 길쭉한 머리와 인상 쓰는 듯한 일자눈썹, 날씬하고 뻣뻣한 몸통과 세로줄 스웨터, 딱 맞는 면바지와 깔끔한 새들슈즈, 위로 삐죽삐죽 솟은 머리카락이 특징이다.


세서미 스트릿에서 언제나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캐랙터다.


진지하다 못해 답답한 녀석이다.


조용한 삶을 추구하는 이런 버트를 언제나 엿 먹이는 캐랙터가 바로 ‘어니’다.


둥글고 납작한 머리, 입가가 올라간 웃는 상, 가로줄 스웨터와 통통한 몸매, 헐렁한 청바지와 낡은 운동화,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 등 버트와 디자인이 정 반대다.


늘 천진난만하고 장난꾸러기다.


어니가 뚱뚱이라면 버트는 홀쭉이다.  뚱뚱이와 훌쭉이 콤비다.
그 옛날 ‘서수남 하청일 콤비’를 떠올리면 된다.


이들은 1969년 이래 같은 집, 한방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잠은 트윈베드에서 따로 잔다.
매일 베드타임 쿠키를 함께 먹으며 하루를 끝낸다.


성격이 다르고 체형이 달라도 늘 공존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이 어니와 버트가 느닷없이 ‘동성애 전쟁터’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토록 같은 방에서 룸메이트로 오래 살았으니 그 둘을 결혼시키라는 주문이었다.
당연히 동성애 지지자들의 청원이었다.  그럼 세서미 스트릿에 드디어 게이(gay)가 등장하는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그들의 전략이었다.
이유식을 떼고 이제 막 TV를 마주하기 시작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보여 지는 세서미 스트릿에 어니와 버트란 게이커플이 등장했을 경우를 상상해 보라.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미칠 영향력은 메가톤급을 넘어 핵 폭탄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 제작사인 ‘세서미 웍샵’ 측은 어니와 버트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인형극은 그냥 인형극일 뿐 지나치게 성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하지 말라고 일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수년간 잠잠하다가 이번 달 다시 동성애를 지지하는 한 매거진 인터뷰에서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세서미 스트릿의 작가로 활동했던 마크 슐츠먼이 어니와 버트는 실제로 게이 커플이라고 말한 것이 잠잠한 호수에 다시 큰 파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제작사가 화들짝 놀라 진화에 나섰다. 어니와 버트는 결코 게이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작가 자신도 인터뷰 도중 경험담을 나누다가 잘못 해석된 부분이라고 불을 끄는데 협력했다.
파문은 그렇게 수그러들지 두고 볼 일이다.


남자와 남자사이 오랜 우정을 나눈다고 모두 게이란 말인가?


구약의 아름다운 우정 다윗과 요나단의 경우를 보자.


그들의 우정은 훈훈하고 아름다울 뿐 결코 게이는 아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라고 요한복음에 기록된 그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골고다 언덕까지 함께 올랐던 제자였다.


목숨을 거두실 때 주님이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 말씀하시며 마리아의 노후를 부탁하셨고 그 부탁을 받아 그는 지금의 터키 땅 에베소에서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


스승과 제자의 이런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놓고 혹시 예수님과 요한 사이도 게이였다고 해괴한 주장을 펼 참인가?


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를 오직 성적인 잣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로만 판단하는 그 편협한 성적 이분법은 우리 사회를 살벌한 대립과 분열의 전쟁터로 만들어 갈 뿐이다.


동성애자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그들의 성적취향을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관용의 마음을 품어야 지당하다고 작심했다가도 어니와 버트를 결혼시키자는 어처구니없는 주장 앞에는 열려지던 마음도 확 닫혀버리고 만다.


전투적 기세도 그렇고 혁명군같이 들이대는 모습도 영 아니다.


동성애 논쟁이란 지뢰밭이 우리사회에서 언제 제거될지 참으로 예측 불가능해지고 있다.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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