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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길 CBS 사장



당시 내 나이 마흔 여덟에 경합을 벌인 상대 후보자들은 오십대 후반의 쟁쟁한 경력자들이었다. 


사실 내가 사장추천위원회에서 뽑은 3명의 본선 후보자에 포함된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본선에서 재단 이사들과 과반수를 얻은 2명의 후보자가 최종 경합을 벌여 사장을 뽑는데, 나는 안타깝게도 최종경합에서 패배의 눈물을 머금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 과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것만 같았다.


신입 사원 시절부터 20년 넘게 출퇴근한 회사가 아닌가.


선거를 치르고 사옥 출입문을 막 나서려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출입구까지 배웅하던 후배를 깊이 끌어안고 서로 어깨만 다독이던 나는 아무말 없이 돌아서야 했다.


나의 선택이 무모했던 것일까? 


이후에 들리는 얘기는, 내가 사장선거 최종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며 뉴스거리였다고들 했다.


우리나라 방송계에서 일단 48세에 사장이 된다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떨어진 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창 일할 나이에 실업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해 CBS 사장이 되고자 했던 꿈과 사명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 암담했다.


아니, 그보다 당장 어떻게 밥벌이를 하며 살아야 할지, 절벽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광야에 들어선 줄도 미처 모르는 채 그저 깊이를 알수 없는 미래의 막막함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로 하여금 사장 선거 낙선 후 주어진 광야의 길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고 깨달았을때에는 긴 시간이 지난 후였다.


당시에 나는 낯설기만 한 '광야에의 초대'를 알아차린다는 것이 역부족이었고, 퇴사 후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 자리잡은 열패감은 나를 갈수록 외롭게 했다.


고난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힘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것을 깨닫기까지 광야의 길은 몹시 고단하고 힘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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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이후로 7년이 지난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CBS를 떠나 실업자가 되고 또 크고 작게 벌어진 어려운 일들, 즉 하나님게서 예비한 광야에의 초대는 실로 내겐 축복이었다는 사실이다.

고통 중에 있던 엘리야의 심령을 소생하게 하셨듯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광야로 초대하신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광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발견한 곳이고, 침묵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숱한 어려움을 동반한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하나님께 질문하는 법을 깨우칠 수 있었다.


내 의지대로 하려던 오랜 습성을 멈추게 하는 광야에서의 침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결국 내가 약할 때 강함 되시는 하나님에게 온 마음을 향하게 하셨고, 그 은혜를 충분히 허락하셨다.


더 큰 은혜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있도록 인도하셨고, 침묵과 고독 속에서 정금같이 단련하셨다.


광야에의 초대는 나를 향한 강렬한 부르심이었다.


7년 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고난이나 고통까지 주님이 허락하실 때 얼마나 큰 은혜인지 고백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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