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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방송인 김종찬씨. 그는 이제 신앙인으로 우리앞에 다시 나타났다.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이 글은, 한때 우리나라의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방송인으로 활동하다가, 분당의 파크뷰 아파트 사업과 관련하여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뒤, 우리에게서 떠나 자취를 감추었던 김종찬이 눈물로 쓴 참회의 글이다.
그리고 그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으며, 하나님을 만난 뒤 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대한 처절한 고백이다.
명쾌한 논리로 현실을 비판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던 그가 비리를 저질러 스스로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그는 세상을 등졌다.
이와 동시에 세상도 그를 버렸다.
우리가 김종찬의 손을 잡고자 했을 때, 그는 우리의 손을 완강히 뿌리쳤다.
그는 자기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죽지 않으면 어찌 거듭 날 수 있으랴.
스스로를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김종찬이야말로 거듭 난 사람이라는 믿음이 솟구쳤다.
우리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죽은 김종찬을 향하여.
그래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완전히 탄 재가 된 김종찬이 우리 모두를 위한 참숯이 되었음을 보았다.
그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연재를 시작한다.
그와 함께 만날 하나님에 가슴 두근거리며.

2002년 7월 2일 저는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글을 적는 일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릅니다.
저같은 죄인은 세상에 나오면 안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 나와 저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맹세컨대 이런 날이 올 줄은 그 날 이후 한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2002년 7월 2일 아침 7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인터폰이 울렸습니다. 누구냐고 했더니, 수원지검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문을 열었습니다.
세 사람의 수사관이 뛰어들어 왔습니다.
저는 퇴로가 없는 집 안에 있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도 허겁지겁한 모습으로 달려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수사관이라는 직업의 속성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체포영장을 제시했고, 미란다 원칙을 지켜 피의자의 권리를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갓 잠에서 깨어 세수도 하기 전이었습니다.
전날 밤, 모처럼 미국에서 온 가족들과 함께 월드컵 축구시합을 보느라 피곤하여,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는 저 혼자였습니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이 현장에 가족들이 모두 있었더라면, 그들이 얼마 나 크게 놀랐겠습니까?
집이 옹색한 탓에 미국에서 온 가족들을 렌트하우스를 얻어 거기서 지내게 하였던 것이지요.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사관들에게 저는 샤워를 하면 좋겠는데, 그래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문을 꽉 닫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부탁인지 명령인지 애매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체포되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셈이었습니다.
목욕을 마친 뒤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정장에, 넥타이도 색깔을 맞춰 골라 매었습니다.
그리고 몇군데 전화를 했습니다.
수사관들의 재촉이 시작되었습니다.
빨리 가자고 하였습니다.
수갑을 채워야 원칙인데, 그러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에 대한 배려였다고 하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숨기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걱정스러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수원지검을 향하여 차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차 안에서는 월드컵 축구시합이 화제였습니다.
우리나라 축구가 새로운 역사를 쓴 해였으니 당연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파크뷰와 관련된 것을 불쑥 묻기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수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침밥을 먹자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들겠냐고 물었습니다.
이럴 때의 대답은 누구라도 ‘아무거나’ 아니겠습니까.
추어탕으로 정해졌습니다.
아침밥을 먹은 일행은 수원지검을 향해 다시 달렸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수원 월드컵 경기장이 보였습니다.
아느냐고 해서 프랑스와의 시합을 와서 봤다고 했더니 부러워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얼마 가지 않아서 수원지검 앞마당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수갑을 채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 팔목에는 수갑이 채워졌습니다.
수사관의 안내(?)하는대로 이끌려 갔습니다.
팔목에 수갑이 채워진 순간부터 걸음걸이가 옹색해졌습니다.
두 팔을 내려 다소곳한 자세로 걸어 보시면 왜 그런지를 곧 아실 겁니다.
수갑은 팔목에 채우는 것이지만 그것은 온 몸과 마음을 채우는 데에 효과가 있는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면 달랐겠지만, 저는 오로지 부끄러웠을 따름입니다.
마치 창고와도 같이, 압수한 물품들이 가득 쌓여있는 허름한 방에서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백지를 주고서는 아는 바를 적으라고 하였습니다.
아는대로 적었습니다.
다시 적으라고 했습니다.
다시 적었습니다.
또 다시 적으라고 했습니다. 또 다시 적었습니다.
이러기를 7~8회 반복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수사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답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작정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답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들의 작정에 부응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로 저는 파크뷰 아파트 사건과 관련하여, 시행사의 대표이사와 당시의 경기도 도지사를 단지 한번 만나게 한 것 이외에는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원하는 어떠한 답도 해줄 수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아는 게 있어야 아는 척이라도 했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아는 게 너무도 없었습니다.
수사관들은 저를 여러 각도에서 다루었으나, 그들의 기대치에 전혀 미달하는 제 답변에 속이 상하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담당검사가 직접 심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르던 사실을 갑자기 알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수사계장에게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이 수사관 저 검사 그 계장이 돌아가면서 심문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하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업자와 도지사 사이에서 돈 거래 곧 뇌물이 오고가지 않았는지에 관심이 많은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과 관련해서는 아는 것이 전무하였습니다.
차라리 뭘 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피차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었습니다.
수원지검에 있는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창살 있는 감옥에서의 첫날밤인 셈입니다.
감옥이라고는 하지만, 구치소는 나중에 간 미결수 감방이나 기결수 감방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그것들에 견주자면 구치소는 감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 역시 휴지처럼 팽개쳐지는 공간이 분명합니다.
저는 팽개쳐진 휴지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2002년 7월 2일 저는 쓰레기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6월 16일 김종찬(전 KBS 집중토론, SBS 전망대 사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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