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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희 집사
(새크라맨토 한인장로교회)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시며
간구하는 자 믿는 자의 편에서 능력을
발휘 하시는 분임을 내 맘속에만
묻어 둘 수가 없어 입으로 시인합니다.

 

우는 아기 젖 더 준다는 말이 있다. 떼를 쓰고 믿고 간구하면서 기도하면 나의 하늘아버지 그 좋은 분이 그냥 있지를 않으신다.
참 좋으신 아버지께서 내게 거저 주신 은혜에 있어서 수금과 비파로 찬양 않을 수 없다. 정말 좋으신 나의 아버지. 나에겐 84년에 낳은 아들이 하나 있다. 그 아들을 얻고 2년 뒤에 임신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그 시기에 새 직장에서 새로운 일을 하고 있었다.
5-10-1986년의 일이었다. 나의 일기장에 정말 자세하게 그날 일이 적혀 있음을 보았다. 난 내가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 초기에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그때 UNITED AIRLINE에서 일을 했다. 임신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많이 걷고 거의 서서 하는 일에 속했다. 공항 내에서 국내선과 국제선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한국말을 할 줄 알기에 배정된 일이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너무 피곤하고 고된 일이어서 그랬을까 일 시작한지 한 일주일쯤 후에 몸에 이상이 왔다. 아침에 일을 나가려는데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서 겨우겨우 움직여 내과를 찾아 갔다. 나는 심한 과민성대장염을 오랜 세월 갖고 있기에 나도 남편도 산부인과 쪽으론 생각도 못했다. 계속 아파 오는 배는 더 이상 걸을 수도 견딜 수도 없이 아파왔다.
내과의사는 병명을 알 수 없다며 진통제주사를 놓아주고 빨리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며 남편이 나를 데리고 S.F.제너널병원으로 갔다. 배가 아파온 시간도 많이 흘렀고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당도하자마자 수술실로 들어갔다. 의사의 말이 자궁외임신이라며 5분만 늦게 왔어도 복막염으로 생명을 잃을 뻔 했다며 난소 제거수술을 한다고 했다.
수술은 잘 끝났다. 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에 병원에서는 수혈을 권했지만 난 후에 있을 그 어떤 부작용이 있을까 염려되어 거절했다. 한때 호흡곤란을 겪었지만 약과 음식물로 잘 견디어냈다. 회복이 거의 되어서 의사를 보러 갔다. 그의 말이 앞으로 임신 가능은 50/50 라는 말을 했다.
가능 반 불가능 반이란 판정이 나왔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우리는 계속 아이 갖기에 힘을 써 보았지만 2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산부인과에서는 1년 이상 자연임신이 안되면 불임검사를 받아 볼 것을 권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기간에 정말 임신인 것 같은 상상임신이란 것도 해 보았다. 산부인과를 찾았을 정도로 심한 입덧이 있었다.
그 다음해인 87년쯤에 나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 일을 했다. 그 직장에 여직원은 둘 뿐이어서 우리는 늘 붙어 다니며 속내를 끌어낼 정도로 가까웠다. 그래서 우린 많이 통했다. 어느 날 우리는 아기에 대해서 이야길 했다.
그 친구는 나 보다 더한 마음의 고통이 있음을 알았다. 결혼 5년 차인데 아직도 아기를 갖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토했다. 나 역시 둘째를 시도 중인데 결과가 없다고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위로의 말을 찾아 서로에게 건넸다. 그렇게 속을 트고 나니 친구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디서 주워 들은 이야기이데 차이나타운에 명의가 있는 한약방이 있다며 나와 같이 가 보길 권했다. 나는 흔쾌히 가겠노라 했다. 주로 홍콩에서 일을 보는 명의로 SF에는 한 달에 두 번 올까 말까 해서 만나기가 힘들다고 했다.
친구는 그곳이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들은 소문에 근거해 우린 더듬어서 그 약방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은 우리를 비껴갔다.
그는 그날 그곳에 어쩌면 절실한 마음을 갖고 있는 두 여인을 위해 그렇게 와 있었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온 이유를 밝혔다. 그러니 아이를 같을 수 있도록 좋은 약을 처방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아마도 우리는 모든걸 다 해보고 짚푸라기라도 잡을 심산이었다  혹여 일이 성사되지 않아도 잃는 것이 있다면 조금의 약값과 내 시간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 이런 짓인들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의사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맥을 집고 나서는 짧은 한마디 “자궁이 매우 차다.” 그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무슨 알약과 한약 3봉지(세 번 먹을 분량)를 주면서 먹은 후 다시 맥을 집고 상태를 보아 약을 지어 준다며 우리 둘은 약봉지를 들고 뭐랄까 서로의 행운을 빌면서 각자의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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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자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약 탕에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약을 다 대리고 나서 나는 그 자리에서 약을 들이키지 않았다. 왠지 맘속에서 거창한 예식은 아니지만 진실로 정성스런 예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는 저녁 잠자리 들기 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잠 잘 시간은 왔다. 그리고 들고 들어온 약사발을 양손으로 보듬고 나는 소원을 담아 아주 짤막하게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이 약을 마시는 순간 나는 임신한 것을 믿습니다. 아멘” 그렇게 간결했지만 진실로 간곡히 소원한 기도였으며 예식이었다. 그리곤 잠자리에 들었다.
난 그때 그 뜨거운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누워 있는 상태에서 아주 강렬한 주먹만한 불덩어리 같은 뜨거운 느낌이 아주 아래 하복부에서 몇 초 머물곤 그 느낌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남편에게 그 희한함을 말하면서 약의 정체도 알려주고 두 번째 아기를 갖기 위해 열심을 다해 밤일을 했다. 날은 밝았다.
나도 떠오르는 해와 같이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내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 “아니 벌써”라고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상황이 그랬다.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가는 곳 화장실에 발을 디디는 순간 비누의 냄새가 보통 때보다 백배는 더 강하게 코를 찌르며 냄새가 역겨웠다. 난 자고 있는 남편에게 달려갔다. “나 임신했어” 라고 외쳤다.
자다 말고 왠 봉창 두들기는 소리야 겨우 어제 저녁 약 한 사발과 한번의 밤일 갖고 그거 또 상상임신 아니냐며 헛다리 집지 말라면서 완전히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고 그는 그렇게 출근했다. 나는 의사를 봐야 했을 만큼 심하게 상상임신을 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남편은 또 속지 않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나도 직장에 출근해 화장실엘 또 갔다. 역시 그곳의 비누냄새가 집에서와 똑같이 역겨웠다. 이 번엔 조심스럽게 친구에게 말했다. “나 임신한 것 같아” 친구의 입장을 보아선 시간을 두고 참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참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친구는 전혀 놀래는 기색이 없었다. 친구는 겨우 말문을 열면서 어제 저녁 한번 먹은 약으로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냐며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믿어 주질 않으니 일주일을 기다리고 산부인과에 전화했다.
증상이 꼭 임신인 것 같은데 알아볼 방법이 없는가가 나의 질문이었다. 겨우 일주일이라면 너무 빨라서 확신하기엔 그렇지만 피검사로 어쩌면 분별이 가능할 것 같단다. 나는 곧 바로 검사를 받고 나흘 후에 검사 결과를 받았다. 결과는? 기도는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다. 누구도 믿지 않았지만 전화 속의 목소리는 “축하 합니다 임신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주님 이것이 나의 간증 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시며 간구하는 자 믿는 자의 편에서 능력을 발휘 하시는 분임을 내 맘속에만 묻어 둘 수가 없어 입으로 시인합니다. 친구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았다. 우린 얼마 후 직장을 그만두고 그 친구는 1988년쯤에 한국비데오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이 됐고 나는 남편과 같이 세탁소를 운영하는 자영업을 하는 주인이 되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나의 삶이 변화되고 변화 받은 그런 일들을 입으로 시인 할 수 있는 간증이 있어야 된다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지금도 종종 들어 본다. 분명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몸소 체험해 본 사람으로서 이러한 은혜를 받고 가만히 있음은 이율배반이라고 스스로에게 말을 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남은 삶을 잘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임신이 되고 나니 욕심 하나가 더 생겼다. 주시는 대로 갖겠습니다 가 아니고 저에게 꼭 딸을 주세요 라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다.
이유는 지금까지 나의 맘 한구석을 늘 아프게 한 어느 못된 여자의 말 한마디가 응어리져 있어서였다. 사람이란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될 말이 있는 것이다.
오래 전 우리는 일곱 쌍의 부부가 가끔 모여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며 때때로 모여서 즐기곤 했다. 그 중에 어찌된 영문인지 나를 이유도 없이 걸고 넘어지려는 심보의 한 여자가 있었다.
가끔 그는 교회에서도 사적인 모임에서도 모욕적인 말로 막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일곱 쌍 중에 나와 친한 여자는 그 몹쓸 여자가 나에게 던지는 그런 말들을 같이 듣곤 했다. 왜, 그는 늘 내 옆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모여 살아가면서 알게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천 명이나 만 명 속에서 분열과 분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둘과 셋 사이에서도 파벌과 갈림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일까 혼자일 때가 가장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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