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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립선암으로 투병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에게 말했다. "빛이 보고 싶다." 방이 어둡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요청에 아들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아들은 휴대전화 카메라로 환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을 찍어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사진에서 본 건 빛이 아니었다.

 십(十)자 모양의 창틀이었다. 신앙이 두터웠던 아버지는 그 사진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크게 기뻐했다. 

사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본 것이었다.

아버지는 한 달 뒤 숨을 거뒀다. 2012년 6월이었다. 임종 당시 아버지는 나무십자가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들은 왠지 그 모습이 십자가의 삶을 살라는 아버지의 유언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아들은 카메라를 들고 전국 곳곳을 누비며 십자가를 찍었다. 

교회 첨탑이나 예배당에 내걸린 십자가가 아니었다. 길섶이나 건물 속에 숨은 십자가의 형상을 촬영했다. 

아들의 이름은 국내에서 유일한 십자가 전문 사진작가인 권산(본명 권오일·43)씨다.
지난달 29일 권씨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서울 지하철 7호선 고속터미널역 4번 출구 앞이었다. 

30도를 웃도는 더위에 아스팔트는 이글거렸고 도로에는 차들이 쌩쌩 내달렸다. 

이곳은 권씨가 선택한 오늘의 십자가 촬영지. 그는 카메라를 들고 반포대교까지 약 1㎞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권씨의 분신과도 같은 DSLR 카메라는 벽돌처럼 무거워 보였다.

“날씨도 더운데 매일 이렇게 촬영하러 나오세요? 그리고 이런 곳에 십자가가 있긴 한가요?”
“하나님이 출근할 때 나와 하나님이 퇴근할 때 귀가합니다(웃음). 

햇볕이 조명이고 자연이 스튜디오죠. 
십자가는 우리 주변 곳곳에 있어요. 저기 보이시나요?” 

권씨가 가리킨 곳은 평범한 맨홀뚜껑이었다. 
그는 맨홀뚜껑을 카메라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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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카메라 액정에는 십자가가 또렷이 찍혀 있었다. 
맨홀뚜껑 무늬에 새겨진 십자가였다(사진①).

몇 걸음 걷더니 이번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보도블록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보도블록 틈 사이로 아카시아 꽃잎이 십자가 모양으로 예쁘게 쌓여 있었다(사진②). 

마치 권씨를 위해 누군가 연출한 듯했다. 
권씨는 담쟁이넝쿨이 우거진 도로 옆 방음벽에서도 십자가를 발견했다(사진③). 

찜통 같은 폭염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촬영에만 몰두했다.

“하찮게 여겨지는 곳에 십자가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아까 점자보도블록 보셨죠. 떨어진 꽃잎,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보도블록…. 
이런 곳에 십자가가 있다는 게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인터뷰는 그가 출석하는 서울 서초구 바우뫼로에 위치한 영일교회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계속됐다. 
교회 복도엔 그가 촬영한 각양각색 십자가 사진 15점이 전시돼 있었다. 양계장에서 포착된 십자가(사진④), 모닥불 십자가 속에 불길로 등장한 기도하는 사람 형상(사진⑤) 등이 눈에 띄었다.

“사진을 찍다 하루에 10㎞를 도보로 이동할 때도 있어요. 매일 500장 넘는 십자가를 카메라에 담습니다. 
집에 돌아가 마음에 드는 사진만 저장하는데, 지금까지 1만장 넘게 저장했어요.”

권씨는 사진을 전공하지도, 유명한 사진전에서 입상한 이력도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에 입대했으며 제대 이후엔 한 디자인 회사에 입사해 돈을 벌었다. 
한때는 기독교 관련 액세서리나 액자 등을 만드는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는 사진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다. 

그의 이름은 금세 유명해졌고 전시회도 수차례 열었다. 

미혼인 그는 비정기적으로 사진학원에 출강해 생활비를 충당한다.

"한때는 십자가 사진으로 엽서를 만들어 팔자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돈을 보는 시선으로 십자가를 찾을 것 같아 마음을 고쳐먹었죠. 
십자가를 파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거든요."

이날 영일교회로 가던 길에 그는 인도에 납작 엎드렸다. 
악취가 진동하는 하수구 옆이었다. 

그는 하수구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가 가장 즐겨 찍는다는 하수구 철망에 새겨진 십자가(사진⑥)였다. 

권씨는 "이런 곳에서 십자가를 발견하면 예수님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고통 받은 분이었잖아요"라고 되물었다.

"죽을 때까지 십자가를 찍을 겁니다. 
이를 통해 명성이 아닌 영성을 쌓고 싶어요. 
성도들도 우리 주변에 항상 십자가가 숨쉬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뒀으면 합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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