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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복서 출신 테너 조용갑(44). 
그는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국기독교회관 6층에 위치한 국제사랑재단(ILF) 문을 스스럼없이 열었다. 

그는 서울 공릉로 드림교회(박현준 목사) 안수집사다.

 “조 집사님 오셨습니까?” 재단 상근자들은 그를 집사라고 불렀다. 

그는 김기택 ILF 상임이사로부터 이사 위촉패를 받았다. 

ILF는 북한 어린이 구호에 주력하는 사역단체다.

“김 이사님의 제안을 받고 반년 넘게 기도했어요. 

국제사랑재단이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사역한다는 게 귀하게 느껴졌어요. 

몇 해 전 중국 국경지역에 갔을 때 탈북자들을 많이 만났거든요. 

동포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들으면서 언젠가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이사를 맡아 재단 홍보와 기획에 적극 참여하게 된 이유다.

2011년 10월 ‘동양의 파바로티’라는 별칭을 안고 14년 만에 금의환향했던 조용갑. 

300여 차례 유럽 오페라 무대 주역으로 섰던 그는 지난해만 300여 차례 간증과 강연을 했다.
 “기업 연말행사 형태가 저 때문에 음악회에서 세미나로 다 바뀌었대요(웃음). 

제가 가면 강연도 하고 노래도 하다보니까.” 

귀국 3년 만에 열정 아이콘에다 희망 전도사로 대환영받고 있다는 얘기다.

“크리스천들이 쉽게 말해 ‘복음의 세속화’를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신앙을 세속화시키자는 게 아니라 안 믿는 분들이 복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자는 거죠. 
제 삶이 그런 면에서 좋은 소재가 되는 것 같아요. 
제 인생에 교회와 하나님이 빠질 수 없거든요.” 


그는 강연뿐만 아니라 저서 ‘희망오페라(2012)’ 음반 ‘오직 은혜(2013)’를 냈다.
조 집사는 귀국 이후 사람을 키우고 사랑을 나누는 일로 정신없이 바빴다. 

“조용갑성악스쿨에서 젊은이들에게 성악을 가르치고 있어요. 
50명 가까이 돼요. 
10여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어요.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지구촌순복음교회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공연을 해요. 
수시로 교회 간증하고 기업 강연 가고요.” 


조 집사는 위촉패를 받자마자 여주교도소로 향했다. 
집회 인도를 위해서다.

“하나님 은혜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 여기에 있지도 못할 겁니다. 
진작 서해바다에 빠져죽었거나 아마 폭력조직 두목이 됐거나…. 하하.” 
크게 웃었다. 

국토 최서남단 도서 전남 신안군 가거도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폭력과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 방황하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야간공고에 다니던 시절 권투를 배웠다. 

한국 프로복싱 챔피언 랭킹 7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 와서 성수동 선반공장에 취직했어요. 
기술자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는데 잘못하면 망치로 머리를 때렸어요. 
시뻘건 혹을 이마에 달고서 화장실에서 많이 울었어요.” 

그때 간 교회가 드림교회다. 

“교회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 신문 돌리고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던 때예요. 
박 목사님이 저를 아들처럼 거두어주셨어요. 
제 첫 교회이자 마지막 교회가 될 것 같아요.”

조 집사는 고교 시절부터 찬양대에서 봉사하며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박 목사의 격려로 1997년 이탈리아 로마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했다. 

“제가 공부하는 동안 1억원가량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주셨어요. 
베르디 콩쿠르 1위를 비롯해 세계 20여개 대회를 석권했어요.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일이지요.”(미소)

곧 설날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 되길 원하실 겁니다. 
설이면 믿지 않는 가족과 제사 문제로 갈등이 많은데요. 
가족과 다투기보다는 사랑으로 감싸면 좋겠어요. 
음식도 사이좋게 나눠먹고요. 저도 기도와 인내로 저희 할머니, 부모님, 동생들을 모두 전도했어요.” 

그는 설레는 표정이었다. 

“설부터 저희 4대가 한 집에서 살게 돼요. 
평생 기도였던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 같아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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