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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대신 가난… 공동 목회 25년째

영락없는 자매지간이다. 
큰언니와 막내동생이랄까. 달랐지만 닮았다.
언니는 겸연쩍게 웃고, 동생은 활짝 웃었다. 
둘 다 미혼이다. 

한 사람은 결혼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했고 또 한 사람은 자발적 선택이라 했다. 
한 명은 시골이 고향이고 다른 한 명은 서울 토박이였다. 두 사람 다 시골을 좋아해 이전엔 경상도 농촌에 살았고, 지금은 전라도 섬에서 산다. 

둘 다 목사인데 사례비 한번 안 받다 지난해부터 10만원씩 받는다. 
그런데도 아주 풍족하게 산다고 고백한다.
이들 ‘자매’가 좋아하는 일과는 불 때는 일이다. 

1주일에 한두 번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지천에 깔린 폐나무와 바다에 떠다니는 대나무를 청소할 겸 모아서 아궁이에 던진다. 
턱 괴고 쪼그려 앉아 빨갛게 타들어가는 불속을 응시한다. 

엄마의 자궁처럼 온기는 그들을 감싸고 해풍(海風)에 찌든 피로를 날려버린다. 
전남 여수시 화정면 송여자도(島) 송여자생명교회 원순희(69) 정은경(55) 목사의 삶이다.

예수님의 가난, 따라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들이 송여자도에 온 것은 2006년. 
경남 거창군 남상면 임불교회에서 만 16년을 목회한 직후다. 
주민 35명이 사는 섬은 아기자기했다. 

자급자족하자는 평소 신념처럼 파래도 뜯어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둘 다 소나무 가지를 주우러 다녔고 불을 지피고 물을 끓였다. 
따뜻했다.

섬에 처음 와서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마을회관에 갔다. 뭘 하시나 궁금했다. 
할머니들은 TV 드라마를 보며 화투를 치고 저녁을 먹는 게 일상이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다. 

하루는 연속극이 끝난 후 화투를 꺼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원 목사는 할머니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교회 목사로 새로 왔는데 예수님 얘기 좀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들은 그러라고 했다. 10분만 하겠다고 했는데 2시간을 넘겼다.
 
할머니들은 “듣고 보니 재미지다”며 매일 한 시간씩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4복음서를 끝냈다. 

재미난 얘기를 듣던 할머니 7명이 교회에 나왔고 이듬해 부활절 세례를 받았다. 
현재 섬 주민 절반이 교회에 나온다.

주민들은 착했다. 

생선을 잡으면 교인이 아니어도 ‘목사님 드시라’며 찾아왔다. 
떠나온 거창의 임불교회 교인들도 틈만 나면 먹거리를 보냈다. 

최근엔 신바람낙도선교회에서 2주마다 생필품을 갖고 방문한다. 

요즘엔 거창 주민들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소식도 들려 떠난 것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 목사는 “다들 우리 보고 섬 살아 고생한다고 하는데 고생은 무슨∼. 여긴 아주 행복한 곳이에요. 주민들만 모두 예수 믿으면 바랄 게 없지요”라고 했다.

이들은 의식주 걱정을 안 했다. 
가난한 마을에서 예수님을 전하다 굶기도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싶었다. 

원 목사는 신학교 때 성경을 읽으면서 다짐한 게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예수님의 가난은 따라할 수 있겠다 싶었다. 

예수님의 다른 성품은 본받기 어려워도 가난해지는 것은 쉬워보였던 것이다. 
그냥 안 가지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첫 목회지부터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그냥 살았다. 

교인들과 효소, 메주, 된장 등을 만들어 팔았다. 20년 동안 옷을 산 적이 거의 없었다. 
거창을 떠날 때 원 목사에게 나온 국민연금 17만5000원이 전부였다. 

‘동생’인 정 목사는 그것마저 없었다. 둘은 당장 계산착오였음이 드러났지만 그래도 행복하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냥 주신다고 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서울 해오름교회(최낙중 목사)에서 후원해 예배당도 새로 지었다. 

원 목사는 “너무 풍족하게 산다”며 부끄러워했다.

이젠 눈빛으로 알아요

원 목사와 정 목사는 서울장신대 동기다. 
1985년 입학해 89년 졸업한 이후 지금까지 함께 지내고 있다. 

졸업 무렵 서울의 빈민가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공부방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보라는 주위의 권면에 순종했다. 

교회 없는 시골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기로 했다.
졸업 후 경남 산청에서 1년간 농촌문화와 목회를 배우고 90년 교회 없는 마을을 찾은 곳이 거창군 남상면 임불리였다. 

33㎡(10평) 남짓한 폐가를 고쳐 예배당을 세웠고 농산물 직거래와 노인대학을 만들어 주민을 섬겼다. 

불교세가 강하던 마을 사람들도 이들의 진정성 앞에 복음을 받아들였다.

원 목사는 과거 경제기획원 소속 조사통계국(통계청 전신) 공무원으로 20년을 일했다. 
그러다 신학교에 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드렸던 서원기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릴 적 동네를 떠돌던 거지들이 불쌍했다. 

그래서 하루는 새벽기도회에 달려가 ‘하나님, 나중에 크면 결혼도 안 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살게요’라고 기도했다.

올해로 공동 목회 25년째. 원 목사와 정 목사는 이제 눈빛만 봐도 서로 뭘 해야 하는지 안다. 

정 목사는 “사역을 분담하긴 하되 정해놓지는 않았다”며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설교는 원 목사가 주일 낮 설교를, 정 목사가 그 외 모든 예배 설교를 한다. 
농어촌은 하루 일과가 일정치 않아 주민 모두가 섬김의 대상이다. 

누가 찾아오면 식사를 준비해야 하고 작업도 같이 한다.

사역 초기부터 수지침이나 뜸 등 자가 치료법을 배워뒀다. 

전도하기 위해서였는데 가끔 몸이 아프면 서로 침을 놔줬다. 
그래도 서로 의지하는 것만큼 큰 힘은 없다. 

원 목사는 지난 5년간 역류성 후두염으로 고생했다. 
정 목사는 ‘언니’가 낫기를 기도했다. 

기도 덕분일까. 원 목사는 최근 새벽기도를 하다 목소리를 회복했다. 5년 만에 찬송도 터졌다.
정 목사에게 공동 목회의 장점을 물었다. 

“서로 보완할 수 있는 게 강점이죠. 의지하고 의논할 대상이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혼자보다는 둘이 있으면 힘이 나겠죠. 

어떤 분이 우리 보고 그래요.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4나 5 같다고요.”
교회를 나서려는데 원 목사가 “새롱아”하고 불렀다. 동네 고양이였다. 

섬에 고양이들이 사는데 교회엔 15마리가 ‘출석’한다. 
원 목사는 그중 세 마리에게 이름을 지어줬다. 

새롱이 아롱이 다롱이. 

그는 동물도 사랑을 받으면 우아하게 변한다고 했다. 
예배당 앞마당엔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다. 

호수 같은 바다도 우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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