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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9년 4월 7일 경남 창원 국제호텔에서 열린 경남도

지사 주재 기초단체장 및 도의원, 시·군의원 오찬에서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다. 



22일 별세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기도와 예배를 게을리하지 않은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그가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갖은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깊은 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현대사에 남겨진 고인의 선명한 족적에는 크리스천으로서 김 전 대통령이 추구하려 했던 메시지가 곳곳에 녹아 있다. 



◇기독교 집안의 외동아들


김 전 대통령은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님을 영접한 기독교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조부는 외지에서 목회자를 초대해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릴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동네 사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집 앞 뽕밭을 기부해 교회를 지었을 정도다. 


신문물에 일찍 눈을 뜬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며 평생을 살았다. 

그는 복음의 불모지였던 거제도를 복음화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김 전 대통령의 부친인 김홍조(2008년 작고)옹에게도 유전됐다. 


김옹은 1960년 공비의 손에 아내 박부련 여사를 잃었는데 박 여사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아내의 삶을 기리기 위해 거제 장목면에 신명교회를 세웠고 장로 직분을 받았다.


김옹은 가산을 털어 마산 등지에도 교회를 건축했다. 그는 평생 5곳의 교회를 설립했는데 별세할 때까지 출석했던 마산 수정교회도 그 중 하나다. 


김옹은 평생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을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부모 덕분에 어린시절 예수님을 영접했다. 


유년기에는 신명교회에 출석했으며 중학교에 진학해 부산으로 유학을 가서는 부산남교회에 다녔다. 


대학시절에는 서울 신암교회에 나갔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87) 여사와 결혼식을 올린 곳도 교회였다. 


그는 51년 3월 경남 마산 문창교회에서 손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장로 대통령’의 탄생


김 전 대통령은 정계에 진출한 뒤에도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인 국가조찬기도회와 국회조찬기도회 탄생에 기여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들 기도회가 시작된 65년부터 기도회에 동참한 ‘초대 멤버’였다.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인 김철영 목사는 “김 전 대통령은 국회조찬기도회가 시작될 때부터 김종필 전 국무총리, 고 정일형 박사 등과 기도회에 참석했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국회조찬기도회가 안착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국회조찬기도회 50주년 기념예배에서 공로패를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이 가장 오랫동안 출석한 교회는 서울 충현교회다. 


65년부터 이 교회에 다닌 그는 72년에 집사가 됐으며 5년 뒤에 장로 직분을 받았다. 


기독당 전 총재인 민승 목사는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장로로 피택되는 걸 수차례 사양했다”고 말했다. 


민 목사는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은 자격이 없다며 겸손하게 말했지만 손 여사는 달랐다. 


그는 남편이 장로가 되길 원했다”면서 “장로직을 수락한 게 훗날 대통령이 되는 데 밑거름이 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전 대통령은 92년 12월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듬해 2월 25일 취임식이 있던 날, 그는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지인들과 취임감사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집전한 신성종 전 충현교회 목사는 “취임식 당일 수많은 취재진이 자택 앞에 모였지만 취임식 전 예배를 드린 사실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며 “김 전 대통령은 취임식장에 가기 전 나에게 안수기도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신 목사는 “당시 나는 김 전 대통령의 손을 성경 위에 얹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는 조언을 했다”며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한 뒤 해외 순방길에 오르면 현지 선교사를 불러 예배를 인도하게 했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청와대에 예배실을 만들어 가족예배를 드렸다. 


일반교회에 다닐 경우 경호원들의 엄중한 경호로 인해 예배가 번잡해질 것을 우려해 군부대의 군인교회에 출석하기도 했다. 


92년 10월 창립한 ‘청와대기독신우회’ 활동도 김 전 대통령 취임 이후 활발해졌다. 


2년제 신학대학이 대거 4년제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것도 김 전 대통령 재임기간 때였다.


김 전 대통령은 다른 종교의 반발을 일으킬 수 있는 언행은 자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장로 대통령’의 등장은 악성 루머를 만들어냈다. 


청와대 인근에 있던 불상을 치워버렸다는 소문이 대표적이다. 

루머가 확산되자 불교계가 강하게 반발했고 지지율도 떨어졌다. 


사태는 당시 홍인길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청와대 뒷산으로 데려가 불상의 ‘건재함’을 확인시킨 뒤에야 진화됐다.


김 전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35년 동안 종교담당 특보를 지낸 김차생(미국 LA 거주) 장로는 22일 국민일보와의 국제전화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을 두고 ‘통일교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실제로는 교회에 안 다닌다’ ‘영부인도 신앙이 없다’ 등 근거 없는 소문이 많았다”며 “전부 다 ‘반대쪽’ 사람들이 퍼뜨린 소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돼야”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기독교 신앙관을 담은 책자도 출간했다. 

1987년 펴낸 ‘신앙강론집: 정직과 진실이 승리하는 사회’(여수룬)이다. 


255페이지 분량의 책에는 그가 품은 역사의식과 일평생 추구하려 했던 기독교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를 비우는 삶에서 시작되며, 역사의식을 갖고 사회참여를 통해 시대적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인의 애국애족(愛國愛族)을 강조했으며 참다운 용기는 신앙에서 온다고 적었다. 


정직과 진실이 승리하는 사회를 위해 그리스도인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생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그가 추구했던 삶은 책의 제목처럼 '정직과 진실이 승리하는 사회'였다. 


그는 이 책에서 북이스라엘 시대 가장 패역했던 아합왕의 시대와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비교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죄악을 저질러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아합왕 시대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독교인의 회개와 사회참여, 결단을 촉구했다. 


김 전 대통령은 93년 5월 대통령 취임 후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해 한국교회의 자성과 회개를 촉구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교회와 기독교인 스스로가 사회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기에 앞서 스스로 오염돼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 특히 기독계에서 일대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 빛과 소금으로 자처하는 기독교인은 참으로 많은데 우리 사회가 어찌하여 이렇듯 타락했는가'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서 "통회의 눈물 없이 자기혁신은 불가능하며 개인적으로건 집단적으로건 통회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퇴임한 뒤에도 김 전 대통령은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김재연 칼빈대 총장은 10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 세계비전교회(현 주안에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던 당시 김 전 대통령과의 일화를 전했다. 


김 총장은 미국을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찾아가 부활절 예배를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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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은 해외에서도 주일을 맞으면 항상 한인교회 목회자를 초청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해 현장에 가니 김 전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 등 15명 정도가 있더군요. 이들 앞에서 부활절 메시지를 전한 기억이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33회 4·19혁명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격려사를 맡았다. 


건강 문제로 참석하지 못해 원고는 김덕룡 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장이 대독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세계사의 당당한 주역으로 우뚝 서는 것이 저의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했다.


이어 "요즘 우리 국민이 꿈과 용기,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어 참으로 가슴 아프다"면서 "여러분의 절실한 기도가 이 나라에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불굴의 신앙인이었던 그가 한국교회에 전한 최후의 메시지였다. 


<뉴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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