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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서울 종로구 송월1길 ‘홍난파의 집’에서 만난 작곡가 최영섭. 

북한땅을 지척에 둔 강화도 화도면 출신으로 강화 길상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수십년을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보내며 주를 

경배하는 화음을 이끌어 냈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86)은 좋아하는 합창곡으로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과 아돌프 샤를 아당의 성가 ‘오 거룩한 밤’을 꼽았다. ‘내 주를…’은 “짜임새 있는 곡”이라 평했고, ‘오 거룩한 밤’은 “화음 진행이 기가 막히다”고 말했다. 


합창은 본래 유럽 음악의 한 연주 형태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넓은 의미의 합창이 교회와 미션 스쿨을 중심으로 일반에 보급됐다. 


홍난파(1898∼1941) 창작곡 ‘방아 찧는 색시’가 ‘신민요합창’이라는 제목으로 경성보육합창단에 의해 불렸다는 기록이 한국음악사에 남아 있다. 


또 합창의 ‘하모니’가 ‘일치 추구’의 사회적 개념을 담아내기도 한다. 


따라서 합창이 됐건 하모니가 됐건 모두 ‘아름다웠던 하나님 공동체 복원을 위해 함께 호흡을 맞추자’는 성서적 언어인 셈이다.


‘그리운 금강산’은 우리 민족의 통일 염원을 담은 국민 합창곡이다. 

작곡가 최영섭이 1962년 한상억 시에 곡을 붙였다. 


당시 KBS가 위촉해 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85년 남북예술단 교환 공연 당시 소프라노 이규도가 평양 모란극장에서 이 곡을 열창, 전 국민의 노래로 불리게 됐다. 


작곡가 최영섭을 만난 것은 5일 서울시 종로구 송월1길 ‘홍난파의 집’이었다. 


이 집은 1930년 지은 독일계 선교사 가옥이었다. 


작곡가 홍난파는 1935부터 6년간 이곳에서 살았다. 그 기간 동안 ‘고향의 봄’ ‘봉선화’ ‘퐁당퐁당’ 등 주옥같은 곡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그의 기념관이다. 


최영섭은 기념관 앤티크 의자에 앉아 미수(米壽)를 앞둔 노 작곡가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열정적으로 음악 인생을 말했다. 



-홍난파 선생과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으십니까. 


“저는 베토벤과 홍난파를 제일 존경합니다. 


‘봉선화’ 3절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는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는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고 그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어요. 

출옥 후 경성방송국에서 조선동요를 작곡해 어린이합창단을 통해 부르게 했고요. 

그렇게 조선 노래만 내보내자 일본 예술곡도 내보내라는 압력에 굴복한 게 오늘날 ‘친일파’로 분류되는 이유죠. 


아흔아홉 개를 잘하고 한 개 잘못했다고 친일파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선생을 친일파로 보지 않습니다. 


독립운동을 한 음악가입니다. 이 ‘홍난파 가옥’은 10여년 전만 해도 폐가였어요. 저와 이문태(67·전 KBS예능국장)씨가 종로구청에 보존 이유를 역설했어요. 


지금 ‘근대문화유산’이 된 계기였던 거죠.”


홍난파의 ‘봉선화’와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은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잘 드러낸 곡이다. 

두 곡 모두 합창곡으로 민족의 혼을 화음으로 일깨운다. 감기로 세 차례나 인터뷰 약속을 미뤄왔던 작곡가는 그때마다 ‘홍난파의 집’ 측에 양해를 구해 인터뷰 장소로 예약하곤 했다. 



-고향 강화와 인천에 최영섭 노래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을 담고 있겠지요. ‘그리운 금강산’은 늘 영광일 것이고 한편으로 소회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내 대표곡 ‘그리운 금강산’은 없었을 겁니다. 


아이러니한 현실이지요. 제 대표곡이 탄생되지 않아도 좋으니 분단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는 거죠. 지난달 이산가족이 만나는 걸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빨리 통일이 되어 후대들이 ‘그리운 금강산? 그런 노래가 있었어?’ 하는 시절이 와야죠.” 



이화여고 음악교사 시절 선배 교사가 최영섭에게 ‘어이 금강산 요새 어찌 지내나’라고 했다는 글을 읽은 적 있다. ‘그리운 금강산’이 그의 삶에 그만큼 강렬하게 작용했다는 얘기다.



-선생께서는 ‘그리운 금강산’을 대표곡으로 꼽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스스로는 어떤 곡을 꼽으십니까. 

500여곡에 이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낸 가곡집만 모두 6권입니다. 이번에 낸 6집은 131곡을 담았죠. 총 522곡입니다. 

그 가운데 ‘추억’ ‘모란이 피기까지’ ‘목계장터’ ‘낙엽을 밟으며’가 아끼는 곡입니다. 조병화 김영랑 신경림 김명인 시에 곡을 붙인 거죠.” 


-522곡 가운데는 성가곡과 찬송가도 있지요. 


“제게 성가와 찬송가는 일반곡과 섞어 선후를 꼽을 수 없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과 같은 것입니다. 

‘영광의 주 여호와’ ‘순교자의 흘린 피로’ 등 40여곡에 이릅니다. 

이는 하나님 영광을 위해 드린 기도인거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서양음악 교육의 혜택을 누렸다는 건 특별한 은혜 같습니다. 

아무래도 작곡가가 되기까지 기독교 영향을 많이 받으셨겠죠. 


“제 고향이 강화도 화도면입니다. 당시 화도에는 소학교(초등학교)가 없었어요. 취학을 위해선 길상면으로 이사를 해야 했는데 길상감리교회 주일학교를 통해 음악을 알았어요. 오르간을 처음 봤어요. 발로 바람을 집어넣고 손을 대니 소리가 나데요. 내 반드시 풍금(오르간) 잘 치는 사람이 되리라 다짐했죠.”


-그럼 악보도 그때 처음 접했겠군요. 


“웬걸요. 당시 시골교회에 악보라는 게 어딨어요? 찬송가 언문 가사만 있죠. 인천으로 이사해 창영감리교회에서 악보라는 걸 처음 봤습니다.” 


-모태 신앙의 축복이 위대한 작곡가를 탄생시켰군요. 

자당께서 하나님 영광을 위한 음악가가 되라고 하셨다죠


"어머니 기도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지요. 98년 정부가 준 '장한 예술가의 어머니상'을 수상하셨죠. 제가 서울 경복중학(당시 6년제) 시절 피아니스트를 목표로 열심히 연주했어요. 


구연소(전 숙명여대 음대 교수) 선배에게 레슨을 받았죠. 그분이 어느 날 자기 두 손을 펼치더니 저보고도 펼쳐보라 해요. 그리고 비교해 보래요. 


제가 그 선배보다 손가락이 2㎝쯤 짧아요. '그 손으로 모차르트, 베토벤 곡을 칠 수 있으나 쇼팽, 드뷔시, 차이콥스키 곡은 안 된다'는 거예요. 작곡 공부를 권하더군요. 


받아들이고 그의 추천을 받아 임동혁(전 이화여대 작곡과 교수) 선생에게 찾아갔어요. 한데 1회 레슨비가 쌀 한가마니 값이었어요. 될 성 싶은가 시험하려고 그런 거죠. 낙담하여 어머니에게 얘기했더니 '무슨 소리냐.


 노래로 하나님 찬양할 사람인데 우리가 굶더라도 그 돈 내야지. 너는 오직 음악만 생각해라' 하셨어요. 강화서 포목점을 하실 때죠. 엄청난 돈이 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그의 천재성은 경복고 6학년이던 49년 '작곡과 양금(피아노)을 위한 작품 발표회'를 열면서 빛을 발했다. 

작곡가 나운영은 그를 두고 '중학생이 피아노곡과 가곡 12곡을 발표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상찬했다.

어머니의 기도는 그를 서울대 음대로 진학하게 했다. 

그는 인천 내리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며 하나님을 섬겼다. '비목'의 작곡가 장일남이 인천 성광고 음악교사를 하면서 그 성가대 반주를 맡았다. 

두 사람은 한국 가곡계 양대 거두가 되었다. 

그러나 60년대 초 방송사 음악프로 진행을 하면서 최영섭은 세상 유혹에 빠졌다. 

유명해지고 수입도 늘자 피아노회사의 중역 초빙에 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 부도로 차압을 당했고 와중에 카지노를 알게 되면서 완전히 망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오는 데 15년이 걸렸다고 한다. 

서울 정동교회 지휘자로 15년을 하지 않았더라면 헤어 나올 수 없었던 욥의 고통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운 금강산'의 가사 '누구의 주재(主宰)런가'가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최영섭. 그런데 그 주재가 잘못 인쇄되면서 한동안 '주제'로 통용됐듯 그도 한동안 뒤틀린 삶을 살았다. 



-95년 광복 50주년 때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음악회 '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을 통해 신앙인으로, 음악인으로의 정상에 이르렀다고 봐야죠. 


"그때 24곡 중 맨 마지막곡이 '그리운 금강산'이었어요. 혼성합창단이 불렀죠. 

관객 3000여명이 15분간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커튼콜만 4번을 나갔어요. '아, 우리가 이토록 통일을 갈망하는구나' 하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리고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요코하마 특설무대에서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그리운 금강산'을 함께 부를 때 저는 마음 깊은데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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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서울 경복중학 6년생(현 고3)이던 작가 최영섭의 작품발표회 프로그램(왼쪽). 오른쪽은 2009년 강화도 평화전망대에 세워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앞에서 포즈를 취한 최영섭 선생.



-광복 70년 해가 저물어 갑니다. '그리운 금강산'과 작곡가 최영섭은 통일의 상징이시고요. 

남북이 '그리운 금강산'을 합창하며 껴안을 수 있을까요.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동족이 헤어진 지 70여년이 넘어가면 통일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구소련, 동·서독이 이 안에 통일을 이뤘어요. 늦어도 1∼2년 안에 통일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매일 새벽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 우리나라를 굽어 살피소서. 지구상 어느 민족보다 뜨겁게 기도하는 민족입니다. 통일의 축복을 주소서'라고요. 

회개하고 기도하는 민족입니다. 남북이 화음만 맞추면 통일의 염원을 이루어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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