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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작가이자 문명 비평가인 린위탕 (임어당).



기독교는 그에게 ‘출발지점’이 아니라 오랜 추구 끝에 도달한 ‘목적지’였다.


중국 작가이며 문명비평가로 이름을 알린 린위탕(林語當 1895~1976)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흡수해 자기만의 사상을 구축한 세계적인 석학이다. 


국내에선 ‘임어당’으로 많이 알려졌다. 그는 1937년에 발표한 대표작 ‘생활의 발견’에서 자신이 ‘이교도’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22년이 지나 65세에 집필한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에서 자신이 긴 우회로를 돌아 기독교로 회귀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내 도덕성에 직관적 지각과 중국인들이 잘 감지하는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신호’에 이끌려 기독교회로 돌아왔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 과정은 만만하지도 쉽지도 않았고, 내가 오랫동안 믿었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린 것도 아니다. 

나는 달콤하고 고요한 생각의 초원을 걸었고 아름다운 계곡을 보았다. 

유교 인본주의의 대저택에 한동안 기거했고, 도교라는 산봉우리에 올라 그 장관을 보았으며, 무시무시한 허공 위에서 흩어지는 불교의 안개를 엿보았다. 

그 이후에야 나는 최고봉에 해당하는 기독교 신앙에 올라 구름이 내려다보이는 햇살 가득한 세상에 도달했다.”




'나는 동서양의 

    정신적 혼혈인'


중국 푸젠성 장저우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린위탕은 엄격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 역시 목사가 되기 위해 세인트존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지만 중단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과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 


이후 베이징대학 교수로 초빙돼 문학비평과 음운학을 가르치면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36년 뉴욕으로 건너가 영어로 수필을 쓰면서 중국문화를 알렸다. 


당시 대표작 중에 하나가 ‘생활의 발견’이다. 


이후 해외에 중국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해 중국 고전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상아탑에 갇힌 학자가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지지하며 활동하던 그는 일본이 몰락한 뒤에도 중국 본토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철저하게 국민당 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홍콩과 미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했고 1948년 유네스코 문학예술부장, 1954년 싱가포르 난양대학 총장을 지냈다. 


1965년 이후엔 대만에 정착했다. 

1966년 장제스 총통이 타이페이 북쪽에 위치한 양명산 기슭에 집을 지어줬다. 


타이페이 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이다.


린위탕이 말년에 10년 동안 살았던 고택을 최근 찾았다. 

타이페이 시당국은 1985년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고택을 ‘린위탕 기념도서관’으로 개관했다. 


이후 2002년 리모델링을 거쳐 전시관과 카페를 겸한 ‘린위탕 하우스’로 운영하고 있다. 

국경일과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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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타이페이시 양명산 기슭에 위치한 ‘린위탕 하우스’ 발코니에서 바라본 전경.



양명산 기슭의 

    '린위탕 하우스'


스페인 건축양식과 중국 사합원 구조를 접목한 이 옛집은 서양과 동양, 현대와 고전이 공존하는 독특한 건물이다. 


작가가 자신을 ‘동양과 서양의 정신적 혼혈인’이라고 표현한 말이 떠올랐다. 

남색 기와와 덧칠해 놓은 듯한 질감의 흰벽, 막새, 회랑, 작은 연못 등은 중국식 정취가 다분하다. 

반면 서양의 아치형문과 스페인식 나선형 기둥, 상단의 모퉁이가 둥그스름한 격자창은 서양건축의 모습이다. 


이 옛집을 지을 때 린위탕이 직접 건축 디자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식 정원엔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작은 연못에 물고기 몇 마리가 여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작가는 늘 부인과 함께 정원에서 아침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는 식사하면서 연못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도 구경하고 주변의 청죽과 풍향수를 바라봤을 것이다. 

바람에 연녹색 대나무 잎이 흔들렸다. 


정원을 걷다 문득 ‘그는 왜 기독교를 등지게 되었을까’ ‘그는 어떤 이유로 회심하게 되었을까’ ‘그를 다시 복음으로 이끈 힘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연못의 파문처럼 일어났다.


작가는 어린 시절 산악지대에 살았기에 하나님의 위대함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산봉우리를 쓰다듬는 아름다운 구름과 황혼녘의 노을, 시내의 맑은 물소리 등, 이런 기억들은 자연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줬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목사가 되기를 포기했다. 


당시 그는 많은 교회가 종교를 ‘일괄 포장'해서 팔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얻은 종교는 가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신앙은 개인이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개인과 신 사이에서 이뤄지는 문제'로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신학 교리에 들어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에게 싸구려 액자 속 렘브란트의 초상화와 비슷해 보였다. 


싸구려 액자가 렘브란트 그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 가치를 가리듯, 교리와 형식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린다고 봤다.

그는 윤리에 관한 한 기독교보다는 유교사상이 낫다고 여겨 열렬한 유교도로 돌아선 후 교회를 등지고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적이 없고, 끊임없이 만족스러운 예배 형태를 추구해 왔지만, 교회의 신학이 나를 가로막았다. 

‘이교도 시절’에도 여러 차례 부담없이 교회 예배에 참석해 봤으나 그때마다 실망만 하고 돌아섰다.”(‘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 중에서)



예수님의 재발견 


그러던 그가 뉴욕에서 유네스코의 문학예술부장을 맡았을 무렵이었다. 


아내를 따라 메디슨 에비뉴 장로교회를 찾았던 그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인격적 일체감을 경험했다. 


예수 이외에 아무도 없음을 그때야 배웠다. 

당시 그는 뿌리 깊은 종교 가정에서 양육된 사람은 하늘과의 절연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체휼했다.


“어느 날 나는 자리에서 몸을 비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넋을 놓고 집중해서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교회를 찾았다. 

데이비드 리드 박사의 설교를 처음 들은 후, 나는 일요일마다 계속 그의 교회에 나갔다.

우리는 반년 동안 매디슨 애비뉴 장로교회에 다니다가 즐거운 마음으로 교인 등록을 마쳤다....

나는 교회 가는 일이 즐거웠다. 

교회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정신에 가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나긴 여정 끝에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기독교로 돌아온 그는 천국에 좌석이 예약돼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믿는 것이 옳은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묻는 이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에서 사복음서를 읽으면 누구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으로 드러내시는 현재의 계시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거라고 권면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여기에 담긴 순전한 고결함을 다음 말씀에서도 볼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것이 예수의 온유한 음성이며 지난 2천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강력한 음성, 위엄 있는 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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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식사 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던 린위탕 부부의 사진. 카페의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이 사진은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소명의 발견을 위한 장소


‘린위탕 하우스’ 내 한 벽면을 차지한 사진에 이끌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는 다정한 작가 부부의 모습이 담긴 사진엔 “청명한 아침 잠자리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대체 이 세상에서 참으로 기쁨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면 늘 음식이 가장 먼저 떠오름을 알게 된다.-생활의 발견 중에서”라고 쓰여 있다.


카페의 발코니는 그가 생전에 저녁식사 후 아내와 차를 마시며 해가 저무는 관음산을 바라봤던 장소다. 그곳에 서니 타이페이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사복음서의 예수를 재발견하고 예수의 생애 전체가 ‘계시’라는 것을 확신한 린위탕은 이곳에서 또 무엇을 발견했을까. 한 낮의 해가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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