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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초동교회에서 25일 열린 백수 감사예배에서 황금찬 시인이 

상념에 잠겨있다.



“최고의 시인은 예수다. 예수의 언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해왔던 황금찬 시인의 백수(白壽·우리나이로 99세)를 기념해 그의 시와 삶을 돌아보는 행사가 열렸다. 


문단 최고령으로 평생 시 쓰는 일밖에 몰랐던 시인의 삶이 오롯이 드러난 시간이었다.


서울 초동교회(손성호 목사)에서 25일 열린 ‘후백 황금찬 시인 백수 감사예배와 기념행사’는 문인 교우들이 황 시인을 위해 준비한 자리다. 


황 시인은 1955년 당시 조향록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시절 이곳을 찾았다가 ‘이 교회에 일생을 묻으리라’ 결심한 뒤 60년 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손성호 목사는 감사예배에서 창세기 24장 26∼27절 말씀을 본문으로 ‘만남, 기쁨, 그리고 위로’라는 설교를 했다. 


손 목사는 ‘청자매병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났노라’로 시작하는 황 시인의 시 ‘청자매병’을 인용했다. 


그는 “험한 현대사 속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청자매병을 찾아 헤맸던 시인이요, 기독인으로서 마침내 누군가를 만난 기쁨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가 참으로 크다”며 “그 은혜로 지금까지 든든히 서 주신 황 선생님과 곁에 계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후 진행된 축하 행사에선 시가 물결치듯 넘실거렸다. 엄경숙 시낭송가와 시인 김경안이 각각 황 시인의 작품 ‘한강이 흐른다’와 ‘에바다’를 낭송했다.


이수웅 건국대 명예교수는 황 시인과의 추억을 회고하면서 “참으로 가난하게 사신 분으로, 그 가난의 미덕이 아름다운 시로 형상화됐다”고 했다. 


또 “지금까지 시집 39권, 문장론과 수필집 22권을 내시면서 하루도 놀 새가 없이 사셨는데, 좀 놀고 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1953년 등단한 황 시인은 39권의 시집과, 8000여편의 시를 남겼다. 


1918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난 황 시인은 일제강점기 함경북도 성진에 살 때 형을 따라 성결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가복음 7장, 예수가 청각장애인을 향해 외쳤던 ‘에바다(열려라)’란 말을 특히 좋아했다. 


사랑과 능력이 담긴 이 말을 ‘절대어’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에바다 외침이야말로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김영진 성서원 대표와 전덕기 한국통일문인협회 이사장이 매주 초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황 시인과 함께 보내던 시간을 증언했다. 


김 대표는 “어느 자리에서든 자연스레 좌장이 돼 시를 읊던,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황 시인을 기억했다. 전 이사장은 “문인들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인은 한국문단의 산 역사나 다름없다”고 했다. 


김태준 동국대 명예교수는 2009년 먼저 세상을 떠난 시인의 장남 황도제 시인의 시 ‘아버지와 달’을 낭송하며 살짝 목이 메기도 했다.


이날 행사엔 교우들 외에 황 시인이 55년부터 78년까지 재직했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동성고 제자 30여명도 참석했다. 


이들은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렸다. 평소 제자들은 물론 어린 학생에게도 말을 놓지 않던 황 시인은 머리 숙여 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곤 “서정주가 읊었던 시”라며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로 시작하는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을 끝까지 또박또박 읊었다. 


황 시인은 “누가 ‘그게 무슨 시냐’고 묻자, 서 시인이 ‘가슴에 담아두고 영원히 영원히 읊어볼 시’라고 말했다 한다”며 “오늘 그 말이 이 자리에서 여물어서 별처럼 떨어지는 걸 봤다”고 했다. 


그리곤 “여러분, 평안히, 영원히, 다시 한 번 영원히…”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요즘 시인은 한우농장을 운영하는 둘째아들 도정씨와 함께 강원도 횡성군에서 지낸다. 


이번 행사를 위해 이틀 전 서울에 올라와 컨디션을 조율했다. 2시간 넘도록 행사에 참석한 데 이어 가족들이 준비한 식사를 제자들, 교우들과 함께 나눴다. 


연로한 탓에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인터뷰가 쉽진 않았지만, 시인의 말은 달랐다. 내놓는 말은 하나같이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지금도 말하는 것이 꼭 시 같다는 기자의 말에 “시인은 늙어도 시는 늙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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