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길따른11.jpg

▲  경남 김해 진영교회 박규남 목사 부부와 세 아들. 왼쪽부터 박 목사 부부, 장남 박성민 전도사 부부, 삼남 박성언 전도사, 차남 박영찬 강도사다. 세 아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는 아버지”라고 말했다.



경기침체와 취업난으로 마음의 위안을 받을 곳이 없는 현대인들에겐 명절도 부담스럽다.


그러나 추석을 앞두고 만난 두 목회자의 가족 이야기는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억대 연봉 대신 농촌교회 목회자인 아버지의 뒤를 잇는 세 아들, 몸이 굳어가는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같은 사명으로 뭉친 가족들 이야기는 지금 우리 시대, 잃어버린 가족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한다. 가족은 우리의 힘이다.


경남 김해시 진영교회 박규남 목사 부부에게는 아들만 셋이 있다.
세 아들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2015년 봄.


충남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이들 3형제는 동시에 입학예배를 드렸다.
귀한 은총의 시간이었다.


세 아들 박성민(33) 영찬(31) 성언(28) 형제는 평생 시골목회를 해온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 경북 경주시 감포, 경남 창녕과 김해 진영읍 등에서 성장했다.


그들은 작은 교회, 작은 학교, 작은 마을에서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늘 말씀에 순종했다.



" 영혼 구원하는
      아들이었으면…"


3형제는 각기 대학생이 되어 본집을 떠나 기독청년의 삶을 살게 됐다.


성민씨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고 포항 한동대 생명과학과에 진학했다. 영찬씨는 부산대 법대, 막내 성언씨는 부산 고신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들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했다.


부모는 타지에서 생활하는 3형제의 생활비와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힘들었지만 한 번도 자식들에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세 아들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맞춰 살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딱 필요한 만큼만 채워주셨다.


성민씨는 벤처창업경진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였다.
김영길 초대 한동대 총장이 아끼는 제자였다.


그는 대학원 진학을 통해 생명과학도로서의 꿈을 차곡차곡 준비해 나갔다.
영찬씨도 법조인이 되기 위해 도서관에 박혀 책과 씨름했다.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스치듯 한마디 했다.


“요즘 청년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더라.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그들이 참으로 대단하다. 너희들도 그런 꿈을 안고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그 많은 청년들이 억대 연봉을 받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고 있다. 억대 연봉을 평생 받으면 40억∼50억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목사로서 그 돈을 받는 내 아들들보다 농촌교회에서 40∼50명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아들들이 더 영광스러울 것 같다.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있겠는가.”


아버지의 권면은 그러잖아도 가슴속에 자라고 있던 아들들의 소명 의식을 일깨웠다.
그 아들들은 키가 자랄수록 부모의 헌신하는 삶을 이해하게 됐다.


어릴 적 “왜 우리 부모는 우리보다 성도들을 더 사랑하느냐”며 투정도 했던 그들이었다.
세 아들은 기도로 답을 구했다.


그리고 한날한시 신대원에 입학했다.


부모는 기쁜 마음으로 한달음에 학교로 달려가 그들을 축복했다.


막내 성언씨는 형들의 신대원 필기시험에 대비해 신학적 지식을 조언하기도 했다. 면접 때 둘째 영찬씨는 “왜 신대원에 들어오려 하느냐”는 면접위원들의 질문에 “목회자인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3형제의 동시 입학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측 10대 뉴스에 꼽힐 만큼 화제가 됐다.
형제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신대원은 사관학교처럼 규율과 학칙이 엄격했다.


슬리퍼를 신거나 반바지를 입는 것도 규제했다.


새벽기도회, 점심경건회, 수요밤예배 등을 일정 횟수 이상 빼먹으면 유급됐다.  PC방 출입도 허용되지 않을 만큼 복음주의 신앙의 원칙을 지켰다.


그런 아들들을 위해 어머니 임찬미 사모는 매일 밤 9시 진영교회 예배당에서 이튿날 새벽 4시까지 기도했다.


“아들 하나하나가 귀한데 다 귀한 길을 가서 너무 복되다”고 감사했다.



세 형제의
'같은 길, 서로 다른 꿈'


지난 10일 진영교회 예배당으로 세 아들이 한복을 입고 방문했다.
흐뭇한 부모는 환한 미소로 맞았다.


박 목사는 보이차를 따라주며 아들들 얘기에 귀 기울였다.
성민씨는 결혼해 며느리와 함께했다.


졸업반인 성민씨와 성언씨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두 사람은 신대원에 들어간 후 1년 휴학을 했었다.


먼저 졸업한 영찬씨는 부산 화명중앙교회 강도사로 시무 중이다.


성민씨와 성언씨도 주말엔 전도사로서 부산 시온성교회와 광주광역시 은광교회에서 각각 사역한다.


박 목사는 “우리 때는 어떤 경우든 정장을 입어야 했다”며 선배 신학생으로서의 경험을 얘기했다.
강도사로 정신없이 생활하고 있는 영찬씨는 “학생 때가 좋은 줄 알아”라며 형과 동생에게 농담을 건네 한바탕 웃었다. 영찬씨가 덧붙였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한 방에 모이면 열띤 신학 논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초급 신학생인 저와 형이 조직신학 등 다양한 학문 영역에 관해 논쟁하면 좀처럼 끝을 낼 수가 없었어요.

그때 동생이 ‘한마디’ 하면 그걸로 조용해져요. 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한 동생이 판가름을 하거든요. 형 둘이 ‘네네’ 했었죠.”


성민씨는 신앙과 과학적 사고를 접목한 신학연구를 하는 게 비전이다.


이를 위해 해외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영찬씨는 아버지가 창녕에서 목회할 때 한센병 환자 등을 섬기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것을 잊지 않고 있던 그는 “작은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성언씨는 “청소년 시절 목사의 아들이라 모든 것을 참아야 했는데, 어느 순간 소망을 엮어내고 오실 예수를 준비하시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부르심에 순종하며 이 길을 걸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 목사가 대견한 아들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너희들과 휴가 가본 경험이 없구나. 그럼에도 하나님 뜻 안에서 순종한 너희들이 참으로 고맙다.”



진영교회는 1901년
스미스 선교사가 설립...진영읍 모교회

신사참배 거부 순교자 배출


경남 김해시 진영교회는 1901년 미국 북장로회 스미스 선교사가 설립한 진영읍 첫 교회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숨진 조용학(1927∼1940) 영수가 첫 순교자다.


또 진영교회와 진영 한얼학교를 이끈 기독교교육의 선구자 강성갑(1912∼1950) 목사가 좌우 이념 대립 속에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진영교회는 구제와 구령에 힘쓰면서 동시에 교회개척과 선교에 앞장섰다.


1998년 부임한 박규남 목사는 한때 분란이 있던 교회를 통합하고 순종과 섬김으로 지역과 교단의 모범을 보여줬다.


이에 따라 진영교회는 2000년대 들어 교인 400여명, 주일학교 학생 200여명으로 성장했다.
2016년에는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새 성전으로 이전했다.


박 목사는 “주일학교는 예산을 결산하려 하면 안 된다”는 목회철학을 가지고 다음세대 전도에 힘쓰고 있다.

인물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