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진행자 김충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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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새벽 1~2시 극동방송 ‘안녕하세요,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진행을 맡은 김충성(35)씨

 

25일 봄 개편에 맞춰 매일 새벽 1~2시 극동방송 ‘안녕하세요,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진행을 맡은 김충성(35)씨의 말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새벽 방송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탈북민들이 그렇듯,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걱정하느라 대외적인 활동은 가급적 자제한다.
어쩌다 전면에 나서면 협박이나 테러 위협 등에 시달리곤 한다.
김씨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어쩌면 선교 방송을 하고 있기에 그는 다른 탈북민들보다 더 큰 짐을 감당하고 있는 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하다.
“북한의 중심인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제가 직접 들어가진 못해도 극동방송이라는 전파를 통해 제 마음은 정성을 실어 평양으로 매일 찾아갑니다. 솔직히 북한의 보위부와 군 관계자들이 주민들보다도 극동방송을 잘 압니다.
주민들은 몰래 숨어 극동방송을 애청하면서 눈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저는 통일 시대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김씨는 북에서 가수였다. 일명 ‘혁명의 나팔수’였다. 어느날 김일성금수산기념궁전에 갔다가 그는 생애 처음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왜 모든 사람이 죽은 자에게 무조건 와서 경배를 해야 하는가?’ ‘왜 죽은 자를 신으로 모시는가?’ ‘왜 내가 이곳에 왔을까?’…. 그는 분명 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고 직감했다.
탈북에 대한 첫 소망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2001년 김씨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차례 생의 경계를 넘나드는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배고픔에 허덕이다 우연히 교회에 들어가게 됐다(김씨는 구체적인 장소 등에 대해 언급을 피함).
그곳에서 보호를 받으며 극동방송을 처음 접하게 됐고, 줄곧 방송을 들으며 한국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4년 7월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건너가 그는 460명의 탈북민들과 함께 전세기를 타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몸이 많이 지쳐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심장과 다리 수술로 몇 개월간 요양기간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뒤 바로 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찾아갔지요. 탈북민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 기도원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어렴풋이 알던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먼저 드리기 위해 기도원으로 갔던 겁니다.”
김씨는 극동방송에 오기 전 공중파 방송을 통해서도 북한에 대해 소개했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의 신앙간증을 토대로 한 라디오 방송용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이를 극동방송이 내보내면서 진행자로까지 나서게 된 것이다.
극동방송은 설립 때부터 하루 3시간씩 북방선교방송을 진행해왔다. 올해로 창사 55주년을 맞았으니, 지금까지 50년 넘게 북방선교의 비전을 감당해온 것이다.
이번에 대폭 프로그램을 개편한 극동방송은 마치 처음의 비전을 재다짐하는 분위기였다.
하루 5시간으로 북방선교 프로그램을 확대 편성한 것과 함께 콘텐츠도 강화했다.
특히 김씨 외에 20여명의 탈북민들이 진행자로 나섰다. 이들 중엔 북에서 자가발전식 라디오를 통해 극동방송을 처음 접한 이도 있다.
김씨는 신학대학에 진학할 꿈을 꾸고 있다. “북한에서 가수로 일한 것을 바탕으로 그 달란트를 갖고 찬양하고 싶습니다.” 이제 혁명이 아닌, ‘복음의 나팔수’로 하나님을 찬양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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