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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십자가 고난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제물이 됐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이므로 우리는 그 빛 가운데에서 살아야 한다. 


‘세상이 우리를 통해 주의 사랑을 보네/주님의 교회를 통해 하늘나라를 보네/예수의 흔적이 우리 안에 있네.’ 문화사역공동체 마커스의 노래 ‘예수의 흔적’ 일부이다. 

이 가사처럼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어떤 삶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가.


곧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주간(21∼26일)이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바보의사’ 안수현(1972∼2006)의 삶, 월세방에서 홀로 외롭게 숨진 할아버지가 남긴 저금통, 메마른 아프리카에 제빵 기술을 보급하는 라팡베이커리(rapang.com) 이야기에서 그리스도의 빛, 그의 ‘흔적’을 찾아본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혈관"

환자 손을 잡고 기도하던 의사

■ 고 안수현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병원의 내과 전문의로 일했던 안수현은 ‘스티그마’(Stigma, 성흔)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던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치료하던 환자가 숨지면 그의 장례식에 가 유족을 위로하고, 퇴원한 환아의 생일에 집을 찾아 선물을 전하는 의사였다.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2000년 의약분업으로 의사들이 전면 파업을 했을 때도 그는 환자들을 위해 병실을 지켰다.

그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15일 서울 성북구 인촌로 고대병원을 찾았다. 


김신곤(49·오이교회) 교수는 후배이자 제자였던 안수현에 대해 “나의 아버지가 임종을 맞을 때 일이다. 수현이가 액자를 가지고 왔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 6:11)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그걸 보신 뒤 편안히 눈감으셨다. 그게 안 잊힌다”고 했다.


안수현의 가방에는 늘 헨리 나우웬의 책이나 찬송 테이프, 말씀 카드 등이 들어 있었다. 

위로가 필요한 환자나 지인을 만나면 그걸 꺼내주곤 했다. 


이 청년은 군복무 중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돼 갑자기 숨졌다. 


안수현이 김 교수의 부친에게 준 액자가 다시 그의 영전에 세워졌다. 


안수현은 유고집 ‘그 청년 바보의사’(아름다운사람들)에서 그리스도인을 혈관(Vessel)에 비유했다.

‘그리스도인은 의학적으로 혈관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그리스도인을 통해 흐르기 때문이다. 혈관인 그리스도인이 더 많이 나누고 베풀수록 더 많은 생명의 피가 흐르게 된다.’


올해 1월 고려대 의대에서 안수현의 10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김효명 고려대 의무부총장은 “많은 학생이 수현이의 이야기를 읽고 의사를 꿈꾸며 의대에 지원한다”고 말했다. 


2009년 설립된 안수현장학회는 인세 등으로 매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는 갔지만 그의 흔적은 아직도 살아 있다. 


김 교수는 “수현이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위인’으로 여기는 걸 원치는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마다 흔적을 남기길 바랄 것”이라고 했다. 


여의도 회사로 돌아와 ‘너 하나님의 사람아’에 이어지는 성구를 열어봤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라고 돼 있었다.




도움 받는 어려운 형편에도

세상서 가장 "무거운 저금통" 남긴

■ 무연고 할아버지


“어려운 삶 속에서도 자립을 꿈꾸며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경기도 안성 세우리교회 김만천 목사는 지난해 말 소천한 교회 성도 A씨(67)를 이렇게 기억했다. 


지난 16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김 목사는 A씨의 생전 행적을 더듬으며 목이 메는 듯 자주 말을 멈췄다. 김 목사는 2008년 교회 장로의 소개로 A씨를 만났다.

 

연고가 없던 A씨는 당시 교회 장로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며 현장 컨테이너 숙소에 머물렀다. 

몇 년 뒤 A씨가 척추관협착증이 심해져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교회가 먼저 A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김 목사가 2012년 교회 안에 만든 작은 공간에 머물다 성도들이 성금을 모아 얻은 월세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A씨에게 수백만원의 빚이 있었다. 그는 일용직으로 일하며 알뜰히 돈을 모아 빚을 갚아나갔다.

 

지난해 초엔 김 목사에게 “빚을 다 상환했으니 1년 뒤엔 교회가 대신 낸 보증금을 갚겠다”는 얘기도 했다. 교회 봉사에도 열심이어서 주일 아침마다 교회 건물 물청소를 도맡았다. 

이웃을 돕는 데도 관심이 많아 교회 나눔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지난해 9월 평소처럼 주일 아침 교회에서 물청소를 한 A씨는 웬일인지 예배엔 나오지 못했다. 

뇌출혈로 반신이 마비됐던 것이다. 


중환자 치료를 받아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지만 다시 급작스럽게 온 뇌출혈로 결국 숨을 거뒀다.

김 목사는 무연고자인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 저금통 2개를 발견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기아대책의 ‘사랑의 밥그릇’이었다. 그가 북한 어린이를 돕자며 교인들에게 나눠준 저금통이었다. 


책상 밑에서는 5만원짜리 지폐 22장이 든 봉투가 나왔다. 


김 목사는 ‘보증금을 직접 내겠다’는 A씨의 말을 떠올리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교인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2개의 저금통을 기아대책 본부로 보냈다. 


A씨가 남긴 흔적, 그 저금통에는 1만7950원어치, 동전 260여개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마음이 가난했던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저금통을 채우고 떠났던 것이다.




제빵은 선교에 쓰도록 주신 도구

아프리카 대륙에 생명과 복음

■ 최병희


전 세계 육지의 20%에 해당하는 아프리카 대륙 3036만㎢ 54개국에 2000여개의 베이커리 프랜차이즈를 꿈꾸는 이가 있다. 


그 꿈을 위해 첫 발을 내딛은 최병희(42·대구동부교회) 라팡베이커리 대표를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선릉로 라팡베이커리 7호점에서 만났다. 


라팡베이커리는 수입밀가루보다 원가가 10배가량 비싼 현미로 빵을 만든다. 

라팡은 쌀(영어 Rice)과 빵(불어 Pain)을 합한 말이다.


“먼저 먹어 보세요.” 


최 대표는 환한 얼굴로 빵부터 권했다. 

밀가루로 만든 빵과 외형은 같았고, 밀가루 빵보다 식감이 부드러웠다. 


“전 경영학을 전공했고, 원래 프랜차이즈 전문가예요. 2000년 대구에서 광고마케팅 회사 ‘레드’를 설립해 프랜차이즈 컨설팅을 시작했어요. 나중엔 하이마트, LG전자, 교촌치킨, 정도너츠 등 20여개 업체가 고객이 됐어요. 잘나갔죠.”


2009년 정도너츠 컨설팅을 하던 중 베이커리 프랜차이즈에 대한 관심이 생겨 제빵 기술을 배웠다. 

2011년 프랜차이즈 컨설팅을 하면서 체득한 시스템과 농업진흥청의 쌀 제빵 특허 기술을 바탕으로 라팡을 세웠다. 


“당일 못 판 빵은 다음날 본사가 전량 재구매해 빵이 필요한 장애인 단체 등에 나눠줬어요.” 

어느 날 탄자니아의 최바울 선교사가 그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댔다.


거리에 널브러진 아프리카 청년들을 데려다 제빵 기술을 가르치고, 아프리카 전역에 베이커리 프랜차이즈를 세우는 ‘라팡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최 대표는 탄자니아연합대(UAUT)에 보낼 제빵 기계와 관련 설비 자재를 선적한 상태다. 

최 선교사는 현지에서 학생들이 제빵 기술을 배우고 베이커리를 낼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가맹점 산하에는 무료 급식센터가 설치된다.


최 대표는 패기에 차 보였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습니다. 저는 프랜차이즈를 만드는 노하우를 배웠고 이 노하우를 선교에 접목하도록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는 생명의 빵 ‘끼니’와 영혼의 빵 ‘복음’을 나눠주고 싶습니다.” 


그는 지금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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