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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학봉 예수마을선교교회 목사가 지난달 30일 경기도 안산 단원구 교회 
본당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중국 옌볜에 자리 잡은 조선족 동포들이 참 많아요. 
그런데 막상 한국에 오면 찬밥 신세죠. 광복과 분단 이후 70년이 흐르면서 조선족도, 한국인도 기억을 잊어버린 거예요. 
요즘은 조선족이 강력사건의 주범으로 꼽혀서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오학봉(51) 예수마을선교교회 목사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말을 토하듯 뱉은 오 목사도 옌볜에 살던 조선족이었다. 

지난달 30일 경기도 안산 단원구 원본로에 있는 교회 본당에서 그를 만났다. 

교회가 위치한 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조선족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 

오 목사는 2012년 7월부터 이곳에서 조선족을 위한 목회와 각종 법률상담을 해오고 있다.

지금은 600여명의 조선족이 등록한 교회의 목회자지만 그 역시 한국에서의 첫 기억은 다른 조선족들과 다르지 않다. 

선교초기에 신앙을 받아들인 뒤 만주로 떠난 집안의 후예인 그가 처음 한국 땅에 발을 내디딘 건 1990년. 

옌볜에 살다 광복 이후 귀국해 전북 전주에 살고 있던 둘째 할아버지의 초청으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에게 한국은 할아버지의 고향이자, 청운(靑雲)의 꿈을 이룰 기회의 땅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중국 옌볜대 예술학부에서 작곡을 공부한 엘리트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180도 달랐다. 

특기를 살리지 못하고 건설현장 등 막노동 일자리를 전전했다. 

어렵게 취직한 철제공장에서는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살기 위해 공장에서 도망쳤지만 그에게는 ‘불법체류자’의 굴레가 남았다. 

오 목사는 결국 4년 만에 옌볜으로 돌아갔다.

옌볜에서의 삶은 술술 풀렸다. 

한 지하상가에서 옷과 화장품을 팔았는데 손님이 몰렸다. 

그렇게 번 돈으로 개인택시를 시작했고 이후에는 땅을 대거 사들여 알로에 재배를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던 시절이었다.

돈이 많아지자 문제가 생겼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직원들과의 회식이 이어졌다. 

자연스레 술에 취했고, 때로는 일탈을 하기도 했다. 

화목하던 가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흔들리던 오 목사를 바로잡아준 곳은 교회였다. 

호주 시드니제일교회 장로인 셋째 할아버지는 술독에 빠진 오 목사를 교회로 건져냈다. 

조선족이었던 셋째 할아버지는 중국 정부가 포교를 금지하자 81년 호주로 떠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옌볜을 잊지 않고 매년 봄·여름 선교여행을 왔다. 

“할아버지에게 붙들려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했어요. 차츰 믿음이 생기더군요. 
교회에 다니며 새로운 비전도 생겼습니다. 
바로 지휘였죠. 성가대를 했었는데 지휘자가 예배에 빠지기 일쑤였어요. 
제가 교회음악과 지휘를 배워 성가대를 이끌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99년 말 서울장신대 교회음악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2000년 한국으로 돌아와 1년간 학교에 다니다 보니 교회음악 이상으로 신학에 흥미가 붙었다. 
성적도 신학과목이 더 좋았다. 

이듬해 장로회신학대 신학과에 다시 지원해 합격했다. 

이후 신학대학원까지 일사천리로 졸업했다. 

옌볜에서 벌었던 돈은 한국에서 공부할 때 큰 힘이 됐다.

오 목사는 신학을 시작할 때부터 ‘조선족 목회’를 꿈꿨다.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 리더가 조선족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안산에 교회를 개척한 뒤 조선족이 머물 기숙사와 함께 ‘중국인성서신학원’을 세운 것도 자신의 뒤를 이어 조선족을 인도할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학원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부천노회의 도움으로 16명의 목회자가 주말에 조선족 학생을 가르치고, 평일 저녁에는 오 목사의 인도로 성경공부가 이뤄지고 있다.

"한국에 조선족이 참 많아요. 
저희 교회 문 앞에서 한 시간만 서 있어도 조선족 수백명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사람은 없죠. 
조선족은 다들 한국인들에게 차별당하고 배신당한 경험이 있거든요. 저 역시 방황한 경험이 있고요. 그래서 조선족인 제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죠." 

쉴 곳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조선족을 위해 쉼터도 만들었다. 
교회 인근에 148.5㎡(45평) 크기의 집 두 채를 임대했다. 

현재 이곳에 머무는 조선족은 20여명. 

오 목사는 조선족이라면 언제든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광복·분단 70주년을 맞는 올해를 조선족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한 해로 만들 계획이다. 

일제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던 선조들의 역사를 조선족들이 먼저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일제 강점과 분단의 역사를 기억조차 못하고 중국을 고향이라 생각하는 조선족들도 많아요. 
한국을, 그저 돈 벌기 위해 오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조선족에게 사건·사고가 이어지는 것도 돈만 바라보기 때문이거든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자긍심을 가진다면 사건·사고도 줄어들 겁니다. 
그래서 올해는 조선족에게 역사를 많이 가르치려 합니다. 
분명한 역사인식과 하나님의 리더십을 갖춘 리더를 양성하는 게 꿈입니다."

<국민일보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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