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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구익 구세군 사관후보생이 28일 아내 문현지 사관후보생과 함께 오른손 검지를 들어올리며 구세군식 인사를 하고 있다.



작은 결심이 대를 이어 100년간 이어지기도 한다.


신앙인의 결심은 그런 경우가 더 많다.


1890년대 태어난 권석교씨는 남편의 결핵 치료를 위해 1917년 경북 안동 구세군 송리영문(교회)에 출석했다.


구세군의 의료선교가 한국사회에 막 뿌리내리던 때였다. 그는 며느리 김순자씨도 교회로 이끌었다.


고부(姑婦) 사이에 시작된 가문의 신앙은 5대째 이어졌다.


김씨의 아들 정태성 사관은 생후 4개월 때인 1927년 헌아식(유아세례)을 치렀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랑을 가득 받으며 교회에 출석한 정 사관의 기록은 송리영문 기념사진 곳곳에서 확인된다.


그는 40년을 사관으로 헌직하며 한센인 구호에 힘썼다.


“쌀밥은 언제나 한센병 환자들의 차지였습니다.
어렸을 때, 그들이 남긴 밥을 달려가 먹곤 하던 기억이 나요.”


정 사관의 아들 정연수(67) 정교(장로)가 28일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


아버지인 정 사관은 월요일이면 자전거를 타고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약을 타왔다.
그 약을 면 단위로 찾아다니며 한센병 환자들에게 건네주었다.


가난한 집이었지만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정 정교의 어머니가 답답해 면박을 주기도 했다.


하나님 사랑도 좋지만, 자식들 배고픈 건 왜 외면하느냐는 투정이었다.
해외에서 보내오는 밀가루와 옥수숫가루도 고스란히 환자들의 몫이었다.


어렸던 정 정교는 쌀밥이 너무 먹고 싶어 한센병 환자들이 먹다 남긴 밥을 긁어먹었다.


30여년이 흘러 정 정교 역시 아버지가 됐다.


포항제철에 다니며 받은 월급의 절반을 1년 넘게 헌금으로 내며 남포항교회(현 구세군포항사랑영문)를 개척할 때 힘을 보탰다.


가난했던 아버지를 때로 원망했지만 헌신을 하면서 자신도 그런 아버지를 닮아갔다.
정 정교의 아들 정구익(32) 사관후보생은 다섯 살 무렵부터 사관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정 정교는 헌신하는 삶의 어려움을 알기에 “정말 그 일이 네게 맞느냐”며 아들에게 수십 번을 물었다.


하지만 아들은 확고했다. 이날 경기도 과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사관후보생은 아내 문현지(24) 사관후보생과 함께 구세군대학원대 신학대학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부부는 “5대째 이어오는 신앙 가문이라는 게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약자를 위해 헌신할 각오는 분명했다.


부부는 “사관 가정으로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어떤 오지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오직 영혼 구원만 생각하는 마음을 끝까지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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