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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일 건강 검진을 받으러 일시 귀국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미르교회

김건수 선교사가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앞에서 북한 복음화를 위한 소망을 밝히면서

환하고 웃고 있다.



“미르 밤(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6일 건강검진차 일시 귀국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미르교회 김건수(62) 선교사가 건넨 첫마디였다. 미르(평화)는 러시아인들이 매우 좋아하는 말이라고 했다.


김 선교사는 유년시절 경남 합천 해인사 아래 면소재지에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가야교회에 다녔다.


그러나 정식 세례는 군병원에서 받았다.


1978년에 28사단 본부 통신병으로 근무 중 얼차려와 낙상 사고 등으로 허리를 심하게 다쳐 진해로 후송됐다.


첫 번째 수술이 잘못돼 통합병원에서 재수술을 하고 79년 3월에 의병제대했다.
하지만 허리는 온전치 못했다.


86년까지는 문 밖 출입을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투병하는 생활이 반복되자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됐다.


“만약에 주께서 저를 일으켜서 걸어 다닐 수 있게 하신다면 반드시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 같은 서원기도가 통했던 것일까.


움직이지 않던 다리가 조금씩 움직이더니 마침내 침대를 내려올 수 있게 됐다.


약속한 대로 그는 안양대 신학과를 나와 경기도 수원 합동신학 대학원 신대원을 졸업했다.


94년에 강도사가 됐으며 이듬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해 러시아 사할린 단기선교를 다녀왔다.


애초 중국 선교를 염두에 뒀던 김 선교사는 2년 동안 아내 오미영(61) 선교사를 설득한 결과 선교지로 우수리스크를 확정하게 됐다.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배수의 진을 친 상태였다.


마침내 의기투합한 부부는 97년 1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부부는 오전엔 러시아인들을 위한 예배, 오후엔 중국인 예배를 번갈아 인도했다.


더운 여름엔 시장 사람들에게 전도용으로 얼음물 봉사를 하는 등 믿지 않는 이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개척한지 20년 만에 성도는 현재 200여명으로 늘었다.


미르교회는 김 선교사가 지난 98년 3월 29일 오 선교사와 단둘이 창립했다.


하지만 서류상으론 창립한지 119년이나 됐다.


사연은 이렇다. 보리스 옐친이 펼친 종교자유정책이 99년 들어 급변했다.


종교법이 엄격해지면서 러시아 정부는 85년 기준으로 이전에 세운 교회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 후 창립된 교회는 모두 폐쇄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었다.


김 선교사의 고민을 해결해준 것은 1899년 우수리스크에 한인 장로교회가 창립됐다는 기록이 담긴 ‘고문서’였다.


다행히 당국은 이 문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미르교회 존치를 결정했다.


김 선교사는 그동안 14개 지역에 교회를 개척했다.


현재도 미르교회를 통해 배출된 복음 사역자 12명이 밤낮으로 기도하며 영혼구원에 몰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노동자 1만여 명이 러시아 연해주 각처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 노동자들이 소수만 남아있고 대부분 북으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저는 앞으로 러시아 시민권을 받아 북한에 직접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무너진 북한교회 재건을 위해서도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김 선교사는 교회 건물을 효율적으로 잘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1층은 교육관, 리모델링한 2층은 예배당으로 쓰고 있다. 문제는 비좁은 예배당 공간을 확장하는 것이다.


현재 방치된 3층의 넓은 다락 공간을 예배당으로 개조하면 된다. 45년에 지은 건물이라 지붕이 낡아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래서 비가 오는 밤엔 잠도 잘 수 없다. 양동이 20여개를 받쳐야 하기 때문이다.


새해엔 지붕을 들어내고 확장 공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김 선교사는 특히 북녘의 노동자들이 교회를 찾아와 안식을 누리고 북한 복음화의 전초기지로 쓰임 받기를 원하고 있다.


또한 현지인들에게도 큰 도전과 용기를 심어주는 등 우수리스크 지역 선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선교센터와 북한 고아원 선교 지원비 마련을 위해서도 두 손을 모으고 있다.


한국에서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인 2명의 전도사 생활비와 러시아에 남겨진 두 가정의 생활비가 모금되어 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김 선교사는 우수리스크 번화가, 젊은이들이 있는 대학가를 선택해 청년 사역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지난달 우수리스크 탐방 때 만났던 미르교회 고려인 성도들의 소망을 다시 한 번 소개했다.


하얼빈에서 일본과 싸웠다는 연해주 노인회장 윤 스타니슬라워(81) 할아버지는 고려인 노인을 위한 경로당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시베리아 강제이주 중 기차 안에서 태어난 홍 안톤(81) 할아버지는 러시아어로 된 한국 역사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랐다.


자신의 아들은 한국어를 모르니까 당연히 한국 역사를 아예 모른다는 것이다.


나아가 러시아어로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책도 발간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


2세 때 부모가 다 돌아가셨다는 최 알렉산드로느바(85) 할머니는 “세상 사람 누구도 공부하라고 한 사람 없었는데, 하나님이 공부하라고 하셨다”면서 “하루 빨리 최재형 선생님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선교사는 “스탈린 사후 60년대부터 한국말을 배울 수 있게 했지만 학교에서 가르쳤던 언어를 사용할 곳이 없어서 언어 교육이 아주 미미하다”면서 “한국정부가 언어 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 우리 후손들이 한국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배려해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허리 디스크는 평생 고질이 됐다. 2005년에는 추간판 탈출증(디스크)으로 3번째 수술을 하고 철심을 양쪽으로 4개씩 8개를 박았다.


이번에 잠시 귀국한 김 선교사는 지난해 발병한 중이염 진료를 받은 뒤 2∼3주 후 우수리스크로 돌아갈 계획이다.


귀국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디서 죽으나 천국가기는 마찬가지인데요. 저는 우수리스크에서 뼈를 묻을 작정입니다. 한반도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이 되면 북한 선교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겁니다.”


<국민일보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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