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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안병욱 숭실대 교수와 고 김태길 서울대 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생전 함께 한 모습(왼쪽부터). <비전과리더십 제공>



혼돈의 시대다.


북핵 문제와 한·일 갈등 등으로 한반도 주변 정세는 여전히 엄혹하다.
국내 상황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최근 우리 사회를 휩쓴 편 가르기식 진영 논리는 국민 분열을 가속하고 있다.


진리 자유 인격 애국 유산(遺産) 등 인간사의 보편적인 사회적 가치도 각 진영의 입맛에 따라 편협하게 당파적으로 해석된다.


같은 단어를 놓고 한쪽에선 극우 단체의 구호를 떠올리고 다른 한쪽에선 좌파가 사회정의를 논할 때 입버릇처럼 쓰는 단어라며 평가절하한다.


김형석(1920~) 연세대 명예교수와 고 김태길(1920~2009) 서울대 교수, 고 안병욱(1920~2013) 숭실대 교수의 글을 모은 이 책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다.


인생의 이치와 우선순위, 건강한 사회의 조건, 우리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친근한 필체로 간명하게 제시해서다.


국내 3대 철학자이자 수필가로 평가받는 이들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같은 해 태어나 철학을 전공했으며 50여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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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민주화 운동 등 격동의 시대 가운데 인격 도야, 이웃 사랑, 애국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책에는 사랑 감사 자유 인격 진리 등 16가지 주제를 다룬 철학 삼총사의 글이 실려있다.
크게는 ‘마음의 열매들’ ‘삶의 열매들’ ‘지혜의 열매들’ ‘진리의 열매들’로 분야를 나눴다.
같은 주제로 작성된 3편의 글에는 저자들 각각의 색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태길 교수는 주로 경험에 빗대 주제를 설명하고, 안 교수는 대체로 동양 고전을 풍부히 인용해 글을 썼다.


김형석 교수는 경험과 동서양 고전을 두루 언급하되 곳곳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담아냈다.
서문은 ‘철학 삼총사’의 맏형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김형석 교수가 썼다.


그는 두 친구의 일관된 애국심이 우정을 더욱 단단히 해 준 근원이라고 했다.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각자 많은 저서를 남겼고 학문과 사회활동에 헌신했다고 평했다.


이는 시대가 요청한 역사적 사명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는 세 뿌리에서 자라 큰 나무가 됐다”며 “이 책을 세 나무줄기에 맺힌 열매들로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애국을 주제로 다룬 글에선 세월이 지나도 쉬 나아지지 않는 사회 병리 현상에 대한 세 철학자의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난다.


김형석 교수의 글에는 3·1운동 참상을 해외에 알린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한국명 석호필) 박사와의 일화가 나온다.


스코필드 박사는 1970년 병문안을 온 그에게 유언처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떠나는 데는 아무 미련이 없지만, 꼭 한 가지 걱정이 남는다고 했다.


그 걱정이 뭐냐고 묻자 “한국의 부정부패, 그 핑계의 병 말이다. 하나님은 내게 한국의 부정부패를 봐야 하는 고통스러운 짐을 주셨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형석 교수는 앞으로 한국인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그에게 약속하듯 말했다.
하지만 스코필드 박사는 쓸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정치가 국회의원 그 밖의 지도자들이지요. 내가 보기에는 여전한 것 같아요. 죽은 뒤에라도 한국에 부정부패가 없어졌다는 소식만 들으면 편할 수 있겠는데… 한국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여기에 달렸다고 봅니다.”


이방인이지만 가장 한국을 사랑했던 스코필드 박사의 이야기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이다.


책 말미에 담긴, 1997년 세 철학자가 참여한 ‘국회 신춘 좌담’에도 우리 시대가 참고할 교훈이 가득하다.


‘국민의식, 일대 개혁이 필요하다’란 주제로 열린 좌담회에서 이들은 역사의식 결핍, 의사구조의 후진성, 지나친 흑백논리를 한국사회 병리현상으로 꼽는다.


그러면서 법과 정책이 아닌 힘과 권력으로 사회를 이끌려 하는 풍토, 경쟁이 아닌 투쟁을 일삼는 세태, 상대방이 없어져야 우리가 산다는 생각을 버릴 때 선진 사회로 나갈 수 있다고 조언한다.
아울러 사회 지도층이 소유욕을 버리고 봉사정신으로 무장하며, 국민 각자가 스스로 비전을 갖출 것도 주문한다.


책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철학자들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이 가득하다.


가벼운 수필체로 쓰였지만 세태의 폐부를 찌르는 내용은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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