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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선교사는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한 A예고에서 불명예 퇴학당한 후 나는 복수하듯 대학 입시에 매달렸다.


목표는 서울대 음대였다.


입시를 준비 중이던 1980년 B대에서 주최한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성악부 대상을 받아 장학생으로 입학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좋은 조건이었지만 ‘A예고 퇴학생’이란 오점을 씻으려면 꼭 서울대에 가야만 한다고 믿어서였다.
서울대에 입학해 보란 듯이 내 실력을 입증하는 게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해 겨울, 나는 열망하던 서울대 음대에 합격했다.


퇴학을 당해 인생이 다 끝난 것 같던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서울대 입학은 어둡고 긴 터널에서 만난 한줄기 빛과 같았다.


희망만 있으면 죽어가는 인생도 언제고 다시 살 수 있음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이런 환희도 잠시, 대학 입학 후 나는 술과 담배에 빠져들었다.


매일 담배 두 갑씩 태우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실기시험 결과는 항상 좋았다.


입학 이후 A학점 아래로 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2학년 때는 전 학년 중 제일 높은 실기 점수를 받아 삼익악기가 후원하는 1년 장학금을 받았다.
노래하는 걸 워낙 좋아했고 실기 시험 전에는 나름 신경을 쓰긴 했지만 무엇보다 목소리의 힘이 컸다.


나는 학교 안팎에서 ‘목소리는 타고 났다’는 평을 들었다.


입만 벌리면 좋은 소리가 났으니 좋은 결과를 내는 건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른다.


동기들은 줄곧 술·담배를 하면서도 실기에 강한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목소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었다.


나는 술독에 빠져 살면서도 교회에 다니며 성가대에 서고 있었다.


믿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면 교회에서 ‘성가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는 상태였지만 생활비는 알아서 충당해야 했던 내게 이만큼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는 없었다.


나는 성가대 지휘 겸 솔리스트로 한 주에 '두 탕' 을 뛰었다.


밤새도록 디스코텍에서 놀다 이른 오전에 사우나에 가서 몸을 푼 뒤 교회에 갔다.


주일 오전 연습은 참여하지도 않고 예배 직전 가운을 걸치고 성가대에 합류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뺨이 불그스름한 채 성가를 부르는 나를 보고도 교회의 목사님과 권사님, 장로님은 매주 손을 잡아주시며 찬양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분명 몸에서 술 냄새가 날 텐데도 ‘어린놈이 주일날 아침부터 술 마셨느냐’란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종종 ‘야유회 가게 돈 좀 주세요’라고 말하면 혈기 넘치는 청춘들이 술 사먹을 줄 알면서도 웃으면서 속아주는 분도 계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사랑이 넘치는 분들이었다.


술에 취해 흥청망청하면서도 매주 성가를 불렀던 이 교회는 서울 종로구 초동교회다.


성도들의 조건 없는 사랑 덕에 나는 대학생활 내내 이 교회 성가대원으로 섬길 수 있었다.
부족한 청년을 믿어주고 기다려준 초동교회는 내게 모교회와 같다.


과연 나라면 술 냄새 풍기며 교회에 드나드는 청년들을 그렇게 품어줄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허물을 허물로 보지 않고 사랑으로 덮어준 교회와 성가대 분들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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