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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의학의 산실 서울역 북쪽 도동 옛 세브란스병원 터의 의사 현봉학 동상. 함흥 미션스쿨 영생여고보 교목 아들이었던 현봉학은 구제를 위해 의사가 되기로 하고 194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의 남대문교회 찬양단원이기도 했다.



출근길. 퇴계로를 지나 서울 여의도로 향하는 버스가 지하철 서울역 6번 출구 즈음에서 신호 대기를 받곤 했다.


그때마다 차창 밖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5m 동상은 연세대세브란스빌딩 앞에 서 있었다.


옛 서울역 고가도로 ‘서울로7017’에서도 내려다보였다.



‘현봉학 박사 상’.

현봉학은 1950년 흥남철수대작전 때 미군을 설득해 9만2000여명의 피란민을 탈출시킨 전쟁 영웅이다.


그해 성탄절을 앞둔 이 작전을 두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칭한다.


사람들은 당시 미10군단 통역이었던 28세 의사 청년 현봉학의 인도주의적 사랑 실천을 두고 ‘한국판 쉰들러리스트’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한국의 모세’라고도 했다.


“장군 부탁드립니다. 제발 우리 국민을 도와주세요. 그냥 떠나버리면 피란민들은 중공군에게 몰살 당하고 말 겁니다.”(영화 ‘국제시장’ 초반부)

이 대사는 통역관 현봉학과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의 대화를 극화한 것이다.


현봉학의 눈물겨운 호소에 알몬드는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란민을 태운다.


당시 해병대 부대장으로 현봉학의 통역을 통해 미군과 작전을 펼쳤던 김성은(2007 작고) 전 해병대사령관은 ‘한국판 모세 사건’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6년 현봉학 동상 제막식에서 그 대탈출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해 흥남부두에 모여든 인파 가운데 문 대통령 부모와 어린 누나가 승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탈출한 문 대통령 부모는 거제에 정착했다.


문 대통령은 1953년 생이다.


그런데 모세와 같은 영웅의 동상이 왜 저 빌딩 앞에 자리하고 있을까.


지금의 연세대세브란스빌딩은 옛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대 전신) 터이고 현봉학이 이 학교 출신 의사이기 때문이다.


1885년 조선 정부로부터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가 받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선교사들은 1904년 제중원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칭하면서 병원과 의학학교를 사대문 안에서 남문(숭례문) 밖 복숭아골(현 도동 일대)로 이전했다.


도성 밖 이전은 구제를 위한 민중병원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함이었다.
병원 부지에는 병동과 의학학교, 교회가 근대건축공법으로 들어섰다.



첫 근대병원 자리에
'한국판 모세'  동상


현봉학은 목사 현원국(1937년 작고·함흥 영생여고보 교목 등 역임)과 신여성 신애균(한국장로교여전도회장 역임) 사이에 태어난 6남1녀 중 셋째 아들이다.


그의 형이 민중신학자 현영학(1921~2004)이고 동생이 해군 창설의 주역이자 호국인물인 현시학(1924~1989) 소장이다.


함흥YMCA 초대 회장 등을 지낸 현원국은 믿음과 현실이 분리되는 삶을 살아선 안된다며 청년층의 가슴에 성령의 불을 질렀다.


선지자적 삶을 살아가던 그는 이화여전 수양회 설교를 준비하다 별세했다.


설교집 ‘생명의 종교’가 1938년 기독교서회에서 출판됐다. 현봉학은 함흥 중앙교회 주일학교를 다니며 성장했다.


현봉학은 “아버지는 ‘기독교인의 용기야말로 종기에서 돋는 새살처럼 교회를 재생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예수께서 남기신 사랑실천의 미완성을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기록했다.


현봉학은 함흥고보 우등생이었다. 2학년 때 조선어 과목이 폐지됐고, 신사참배를 해야 했으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탄압 대상이었다.


“아무리 반발하는 마음이 강해도 그것을 드러낼 수 없었던 우리의 비극과 나약함이 슬프고 서러웠다”고 술회했다.


그럼에도 교회와 학교에는 늘 기독교정신으로 살아가는 선생들이 있었고 심지어 일본인도 있었다.


그는 기도하는 청년으로 살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함흥고보 졸업 후 세브란스의전에 진학했다.
캐나다장로회 조선선교부가 현봉학 등 우수한 청년들의 학비를 도왔다.


그는 병원 및 학교 교회인 남대문교회 찬양단원 등으로 활동하며 예수 닮길 원했다.
무엇보다 병 고치는 은사에 충실했다.


지난 23일 ‘서울로7017’에서 바라본 근대의학의 산실 옛 세브란스병원 일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근대도시 조성을 이유로 병원 부지 사이로 길을 뚫었다.


지금의 퇴계로 시작점이다. 현 연세대세브란스빌딩 뒤편 도동과 퇴계로 입구, 봉래동 남대문교회 일대는 한국교회사의 의미 있는 땅이고 그 땅 한가운데 현봉학 동상이 건립된 셈이다.


순례길로 꼽아도 손색없다.


현봉학은 세브란스의전 시절 남대문교회 집사 가정의 가정교사로 입주해 생활하며 후암동 가마쿠라보육원(현 영락교회 사회복지시설 영락보린원)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했다.


가마쿠라보육원은 한국인을 사랑한 일본인 목사 소다 가이치(1867~1962) 부부가 운영했다.


“부부를 통해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이 무엇인가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식민지 청년에게 신선한 감동을 준 소다 할아버지 내외와 같은 길을 걷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해방 전 평양기독병원 인턴 과정서 ‘성자’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로부터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90년대 그가 평양에 갔을 때 이산가족인 장 박사 북측 가족과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피난선 안에서 태어난
5명의 생명


현봉학은 1947년 선교사들의 도움 등으로 미국 버지니아주립의대 수련의를 거쳐 세브란스의전 강사를 하다 6·25전쟁을 맞는다.


피란 대열에 합류한 그는 수원 즈음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돌본 것을 계기로 육군병원과 같이 행동하게 된다.


10군단 알몬드 소장은 버지니아 루레이 사람이었다.


통역장교가 된 현봉학은 고향과 다름없는 함흥에서 교인과 고향사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알몬드 소장에게 매달렸다.


알몬드는 현봉학의 억양에서 버지니아 영어사투리를 느껴 그의 호소에 귀 기울였다.
자신의 고향에서 공부한 청년이라니…그리고 피란민을 승선시키라고 명령했다.


섭리로밖에 이해될 수 없는 대목이다.


“고맙다고 몇 번이나 머리를 꾸벅거리고 함흥시청과 도청으로 가서 모든 방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했어요. 나는 남부교회와 중앙교회, 성결교회, 운흥리교회에 들러 흥남부두로 가라고 했죠. 남부교회에 갔을 때 교인 40여명이 내일이면 함흥이 함락된다며 절망한 가운데 지하실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제가 전해 준 철수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모세가 우리를 구하러 왔다’며 감격했습니다.”


의사 청년 현봉학. 그는 1950년 성탄절을 앞두고 그렇게 대탈출을 위한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그중 1만여명이 탄 빅토리아호에선 다섯 명의 새생명이 태어났다. 미군은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김치 1, 2, 3, 4, 5’.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이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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