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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훈 머리앤코 글로벌한의원 대표원장이 지난 14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태훈(56) 머리앤코 글로벌한의원 대표원장은 복음 실은 인술을 펼치는 한의사다.


하지만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건 고난이었다.


아픔 속에서 성숙했고 그 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 원장을 지난 14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한의원 원장실에서 만났다.


한의사로, 남서울비전교회 협동장로로 사역하는 지금의 그를 보면 어디에서도 그림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부모님은 제가 두 살 때 이혼하셨어요.
그때부터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양자로 들어갔지만 편칠 않았어요. 7살 때 만난 양부모가 8년 동안이나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와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같이 살 형편이 아니었죠. 15살이 된 어느 날이었습니다. 날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뛰어내리자’ 마음먹었죠.”


사랑받고 자랄 나이에 가해진 가정폭력은 그를 극단적 선택의 문턱까지 끌고 갔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친 게 있었다.


도덕 수업 시간에 얼핏 들었던 말이었다.


“창조주는 모든 인간에게 소명을 줬다”는 것이었다.
‘소명’이 죽음의 강을 건너려던 이 원장의 발길을 되돌렸다.


살기로 다짐한 이 원장은 언젠가 들었던 하나님의 형상도 떠올렸다.


“두 번째 삶은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공부하게 해 주세요.”


문득 이렇게 기도했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그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 순간은 이처럼 극적이었다.
하나님을 마음에 품었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눈만 마주치면 폭력을 휘둘렀던 가정이 부부의 이혼으로 깨져버렸다.
갈 곳이 없었다.


그때 형이 살고 있는 집에서 살 길이 열렸다.


“형이 수재였어요. 공부도 할 수 있게 됐다고 반색했죠.”


하지만 형이 지내는 가정도 이 원장을 괴롭혔다.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고 어머니는 자취방을 얻어줬다.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독히도 가난했다.


공부는커녕 당장 먹을 게 없었다.


간혹 밥을 얻어오면 간장과 마요네즈가 반찬의 전부였다.
겨울에는 온몸에 비닐을 감고 살았다.


서울 대성고에 진학했지만 가난은 그를 더욱 옥죄었다.


“그런데 부모가 제게 명석한 두뇌를 주셨더군요. 공부하면서 알았습니다. 기초가 없이 시작한 공부인데도 꾸준히 성적이 올랐습니다. 대입 학력고사를 100일쯤 앞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벽을 짚고 다닐 정도였죠.”


설상가상이었다.


“입시를 11일 남겨두고 형이 찾아왔어요. 2만원을 쥐어주고 울면서 돌아가더군요. 그 돈을 갖고 종로 공안과를 찾아갔습니다. 영양실조가 원인이라더군요. 의사가 회복은 가능하지만 당장은 불가능하니 올해 입시는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새워 기도했다.


“열흘만 앞을 보게 해 주세요. 그 뒤에 실명시키세요.”


기도하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기적을 경험했다.


희미하지만 앞이 보이는 것이었다.


목숨을 건 열흘간의 벼락치기에 들어갔다.
목표는 경희대 한의대였다.


결국 83학번으로 한의대의 문턱을 넘었다.
시력도 회복됐다.


여전히 가난했기에 돈을 벌려고 이화여대 앞에서 3년 동안 노점도 운영했다.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때쯤 학업이 끝났다.


92년 한의사가 됐지만 곧바로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
모두 이겨내고 93년 개원해 큰돈을 벌었다.


98년 외환위기 때는 병원이 있던 성남시의 결식아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면서 여러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대한민국에서 결식아동을 가장 많이 지원하는 사람으로 한 방송사 인기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한 적도 있었다.


“돈도 많이 벌고 어려운 아이들도 도왔지만 정작 절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겸손함을 잃었어요. 교만함은 절 무너트렸죠. 지긋지긋한 가난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병원이 망했거든요.”


아내 이재희(58) 남서울비전교회 권사와 함께 찜질방을 전전했다.


인터뷰에 함께했던 이 권사는 “늘 채무자들이 따라다녀 정상 생활을 할 수 없었다”면서 “가족도 깨지고 매일 피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


모든 걸 잃었지만 이 원장은 오히려 평안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떠돌아 다니면서도 머리와 코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확신합니다. 새로 개발한 치료법은 성공적이었죠. 이 과정에서 형님과 처형으로부터 큰 도움도 받았습니다.
결국 지금의 머리앤코 한의원을 세우게 됐습니다.”


갖가지 고난을 겪은 그는 어느새 ‘고난 전문가’가 됐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겠다는 다짐도 했다.


“워낙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어요. 이젠 겸손하게 해야죠. 복음과 사랑을 함께 전하고 싶습니다.”


이 원장은 지난달 캄보디아 씨엠립 일대에서 의료선교를 한 일을 소개했다.


“아내와 함께 의료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보람이 컸습니다. 400여명을 진료하면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지고 복음이 심기게 해 달라고 말이죠.”


이 원장은 요즘 은평구의 한 지역아동센터 어린이 12명의 호흡기 질환을 무료로 치료하고 있다.
자신의 달란트를 나누는 셈이다.


이 원장 부부는 무의촌 진료를 다니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우리나라든, 해외든 의사를 만나지 못한 이들을 찾아다니고 싶어요. 진료버스도 마련해 순회진료를 하는 게 꿈입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의술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국민일보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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