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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라 집사

<시애틀 지구촌 교회>




일주일 전 작은 엄마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난소암으로 시작하여 자궁, 위, 폐까지 전이되어 암 투병을 하신 지 수년이 지난 터라 가족들 모두 긴장감이 무뎌졌었는데, 이제는 그 끝이 오려나 보다. 


이젠 병원에서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여 격리실에 홀로 남겨진 작은 엄마는 그 외롭고, 두려운 시간 속에서 사랑한다, 미안하다, 감사하다 전화로 인사를 남기고 있었다. 


 때마침 목사님의 권유로 사 놓은 유석경 전도사님의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라는 책이 배달되었다. 


하필 이 상황에 이런 책이라니. 


조금 망설여졌지만, 작은 엄마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이 책에 대한 가장 큰 오해였다. 


책은 그녀가 암 투병으로 인하여 직접 쓰지는 못하였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그녀의 설교, 강연, 세미나 등을 정리하여 묶은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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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장마다 마치 그녀가 다시 살아 내 앞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듣는 듯했다. 

이 책을 시작하는 부분에 나오는 그녀의 신앙고백은 흡사 나를 거울로 보는 것만 같았다. 


모태신앙으로 자라 습관처럼 교회를 다니던 나. 


첫 중고등부 수련회에 가기 전, 같은 고민을 했고, 같은 답을 얻었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이야기를 회상하듯 순식간에 책 속으로 집중하며 들어갔다. 


  그녀의 암 진단 후 수술을 받지 않기로 한 부분을 읽으면서도 난 동의하듯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 또한 자연스럽게 주님이 허락하시는 그 날까지만 살다 가고 싶으니 말이다. 


언젠가 갓피플이라는 크리스천 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이런 배너를 본 적이 있다.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사진 배경에 쓰인 글은 ‘괜찮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죽지 않아.’였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그분의 허락이 없다면, 우리는 마음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말처럼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좋은 약을 먹고, 훌륭한 치료를 다 받는다 하여도 주님께서 내 생명을 가져가시겠다고 하시면 그만인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면, 놓이지 않던 것도 한순간에 놓이더라는 말도 이해가 되었다. 


작은 아빠와 우리 아버지께서 수년 전 서로 다투신 후 작은 집과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가족들이 어떻게든 화해의 장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쉽지 않았던 일이 작은 엄마의 죽음을 앞에 두니 너무나 쉽게 해결되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용서도, 사랑도, 결단도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그 어떤 부수적인 삶의 것들이 부질없어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장 맨 처음에 있는 성경 구절은 1년 동안 주님께서 두 번이나 내게 보여주신 말씀이었다. 

이 책을 읽음으로 총 세 번째 받게 되는 말씀이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장 11절'


 작년 3월 이 말씀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나는 의문이 생겼다. 


사실 성경을 매일 읽지만, 이 말씀은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했고, 그 내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그 후에 바로 독일에 계신 이모의 비보를 듣게 되었다. 

엄마 같았던 이모의 죽음은 내게 재앙과 같았다. 


반년을 정신 못 차리고 슬픔에 헤매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수필로 적어 낸 공모전에서 난 생각지도 못하던 대상을 받고 작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평생 글쓰기를 소망했던 나였다. 


주님께서는 결국 이모의 죽음이라는 고난을 통하여 내 미래를 여시고, 희망을 주셨던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주님께서 아시는 나를 향한 계획이 무엇일지 몹시 떨리는 마음으로 기대하며 산다. 

  

그녀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보는 시각은 나에게 크나큰 울림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예를 들은 모든 케이스가 다 내가 행하고 있는 실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자유의지로 행하여 놓고서 ‘모든 일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라고 생각한 것, 세상에 일어나는 재앙들을 보며 ‘그래, 저 나라들은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는 거야.’라고 내 마음에 정죄한 것.

 

그녀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더욱이 죄인들이 모두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성숙을 위해 고난과 실패를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으로 답이 된다.’라고 한 그녀의 말에도 동의가 되었다. 


우리가 주님을 잘 믿으면 고난이 꼭 찾아온다는 말은 나도 흔히 하는 말이었고, 내 남편이, 내 믿지 않는 식구들이 나의 십자가라고 하고 다닌 적도 많았었기에 책을 읽으며 참 부끄러웠다. 


난 십자가 위에서의 사랑과 은혜를 그리며 날마다 눈물짓지만, 그 십자가의 의미를 너무 가치 없게 만드는 죄인이었구나. 


생각하며 다시 한번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을 다시 만났던 베드로를 상상한 적이 있다.  내가 만약 그때의 베드로였다면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어땠을까? 


난 갑자기 울음이 났다. 


주님께 너무 죄송해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겨우겨우 삐져 나왔을 것 같다. 


두 번째 물으시고, 세 번째 다시 물으실 때는 고개가 점점 더 숙어지고, 목소리도 기어들어 갔을 것이다. 


나도 그녀가 좋아한다는 ‘나는 믿네'라는 찬양을 참 좋아한다.  특별히 ‘내 앞에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주가 나로 바다 위 걷게 하리' 라는 가사는 수십 차례 돌려 듣기도 했다. 


우리가 홍해와 같은 거대한 문제 앞에 서 있을 때,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바다를 갈라놓을 수도 있으시겠지만, 베드로와 같이 그 바다 위를 걷게 하신다면 얼마나 놀랍고, 멋진 일이겠는가. 


온몸에 희열이 느껴지는 상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뛰어넘으시니, 우리의 방법이 아닌 그분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실 때, 배 안에서 예수님과 베드로를 보고 있었던 제자들처럼 ‘주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는 세상 거짓말에 속으면 안 된다. 


가끔 나의 과거의 죄들이 다시 살아나 나를 괴롭힐 때가 있다. 


분명히 이 문제는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신 것이고, 용서함을 다 받은 일인데도, 사탄은 자꾸 내게 그런 귓속말을 하며 좌절시키려 한다. 


열심을 내던 사역들도 ‘내가 이런 사역할 자격이나 되나.’ 싶어 내려놓고자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아진다. 


이것이 사탄의 노림수다. 


어느 교회 신년 배너에서 참 멋진 글귀를 본 적이 있다.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뜨자!’ 


나의 아버지 되시는 주님을 빽으로 나는 이미 승리하였다. 


그렇기에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세상과 맞짱뜰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전도에 대한 열정은 참으로 나를 도전케 했다. 


나도 책의 예시처럼 전도의 은사가 없다는 핑계로 직접적인 전도를 하지 못 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비신자들이 목장 안에 들어오면, 그 안에서 복음 메시지를 전하는 게 전부다. 

그런데, 올여름에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 시댁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시누이네 가족이 시애틀 우리 집으로 한 달간 여행을 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중보 기도팀에 기도 제목을 올리고 한 달 넘게 용기없는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꼭 그들이 이번 기회에 주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시누이네 부부는 오기 전부터 교회를 가려면 정장을 챙겨 가야 하냐, 아이를 낳고 보니, 아이들은 역시 교회에서 키워야 올바로 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용기가 생겨 열렬히 복음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은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매주 교회에 나간다. 


내게 이번 주도 교회에 나갔노라고 인증사진을 보내 줄 때면 이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께 할렐루야! 가 절로 나온다. 


이 책을 삽시간에 읽어내리며 나는 잠시나마 그녀의 깊은 통찰력에 감탄하였다. 


그것은 분명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받은 것임이 틀림없다. 


내가 고민하였던 문제들, 내가 괴로워했던 문제들을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같은 소그룹 친한 자매처럼 사랑을 담아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작은 엄마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애가 3:26'


  나는 작은 엄마에게도 주님께서 잠잠히 기다리는 시간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바쁘게 내달리던 삶 속에서 주님을 멀리했지만, 이제 곧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사랑하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기회인 것이다. 


마지막 고통 속에서 그녀처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그동안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오해하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마지막 간절한 외침을 통하여 이해하게 되었다.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신뢰했다던 그녀의 고백처럼 나도 주님을, 나의 아버지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신뢰하기를 결단했다. 


  오래전에 사모님과 함께 성경공부를 할 때, 사모님께서는 내게 이런 질문 하나를 던지셨다. 


"지금 당장 죽어 주님을 보게 된다면 첫 마디로 뭐라고 하고 싶으세요?"


나는 천국에 오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먼저 말해야 하나, 아니면 회개하며 용서해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아니면,  안녕하세요?  별의 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때 사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는 ‘주님, 오늘 아침에 우리 함께 이야기하던 것, 마저 할까요?’라고 할 거예요. "  


맞다.  날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한 크리스천이라면 주님께 그렇게 첫 마디를 내뱉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꼭 그녀가 주님을 천국에서 만나 그렇게 말했을 것만 같다. 


주님의 품에 행복하게 안기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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