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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익 교수



본지는 유영익 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가 과거에 쓴 논문 '우남 이승만의 기독교 건국 리더십'을 3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지난 3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관련,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촉발시킨 논란과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그의 기독교 신앙을 다시 돌아보고자 합니다.
유 교수는 미국 휴스턴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부교수(Tenure 취득),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 역사학회 회장,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부설 현대한국학연구소 창립소장,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편집자 주>







이승만...조선왕조 왕족가운데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
서울 정동 감리교회 등록교인, 1956년 이후 명예장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하나님 앞에 서약



이 기도 후 계속된 회의에서 이승만은 재석 의원 198명 중 188표로 의장에 당선되었는데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 이승만 의장은 다시 한 번 아래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된다고 발언하였다.
"우리가[는] 오늘 우리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이 있게 된 데 대하여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째 애국선열들의 희생적 혈전한 공적과 셋째로는 우리 우방들 특히 미국과 국련의 공의상 원조를 깊이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후 약 두 달이 지난 7월 24일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7월 24일에 거행된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서를 했다.
그리고 8월 15일에 개최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서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는 취임사를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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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정책


이상과 같이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를 출범시킨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5월에 하야할 때까지 12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영부인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여사와 함께 조석(朝夕)으로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실천하였으며, 서울 정동감리교회의 등록교인-1956년 이후에는 '명예장로'-로서 주일 예배를 거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독실한 신자로서의 모범을 보인 그는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사실상 형해화(形骸化)시키면서 기독교(특히 개신교)의 교세신장을 위해 일련의 특혜조치를 취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를 장려하기 위해 실시한 주요 조치는 다음과 같다.


(1) 국가의 주요 의식을 기독교 의식에 따라 집행하였다.
(2)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정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바꾸었다.
(3) 군대에 군종제도(軍宗制度)를 도입함으로써 군에 복무하는 병사들에게 기독교 전도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또 감옥에 형목제도(刑牧 制度)를 도입하여 옥중의 죄수들에게 기독교 전도의 문을 열었다.
(4) 정부 요직에 기독교 교인들을 많이 기용하고 기독교 교인들로 하여금 국회에 많이 진출하도록 권장하였다.
(5) 기독교 신문과 방송사의 설립, 기독교계 학교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YMCA 및 YWCA의 활동을 장려 내지 지원했다.
(6) 기독교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6·25전쟁 기간과 그 후에 외국(특히 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통해 개별 교회와 교역자들 그리고 신학교 등에 배분토록 하였다.


해방 전 (현재의 남북한을 합친) 한국 전체의 기독교 교인 수는 37만 명에 불과했다. 해방 후 38선 이남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남한에는 기독교 교인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나 1950년에 이르러 그 수가 60만 명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통치 기간에 교인수가 부쩍 늘어 1960년에 남한의 기독교인 수는 무려 16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의 기독교 교세는-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에 다져진 기초를 바탕으로-날로 팽창하여 2005년 말 현재 기독교인 총수가 1,376만 명(개신교 861만 명; 가톨릭교 514만 명)에 도달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정책에 힘입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정권의 탄생을 경험하였고 나아가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5. 맺음말


이승만은 조선 왕조의 왕족 가운데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지식인 개혁가였다.


한성감옥서에서 성경을 연구하며 옥중 전도에 열을 올린 결과 40여 명을 기독교로 인도하는 놀라운 전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한국 백성을 기독교로써 거듭 나게 만들 목적으로 미국 유학 기간에 기독교 신학을 공부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서울과 호놀룰루에서 다년간 기독교 교육 내지 전도운동에 헌신하였다.


3·1운동 후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그는 새로 태어날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해방 후 33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귀국 직후 정동교회 예배당에서 '성경말씀을 토대로' 새 나라를 건설하자고 역설했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는 제1차 제헌국회의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맨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림으로써 대한민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고 서약했다.


그 후 12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남한을 통치하면서 그는 음·양으로 기독교 보급에 힘을 기울인 결과-원래 '모범적인' 유교 및 불교 국가였던-우리나라를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다져진 기독교 교회의 기반은 1960년대 이후 '폭발적인' 교세 신장의 도약대가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은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공(功)은 서기 313년에 '종교 자유의 칙령'을 발포함으로써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기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r. 306-337)의 공적에 비견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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