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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수많은 증언을 바탕으로 2000년 동안 전해져왔다. 사진은 영화 ‘부활’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AD 33년 유대 광야. 로마군 10군단 소속 호민관 클라우비스는 영내를 빠져나와 어디론가를 향하고 있다. 


흉갑이나 검을 착용한 단독군장 차림도 아니다. 


그가 군인임을 보여주는 유일한 표시는 반지뿐이다. 


얼굴은 초탈한 표정이다. 


광야 길을 걷다 머문 허름한 집. 


주인은 그의 반지를 슬쩍 보더니 “호민관이냐?”고 묻는다. 

클라우비스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대신 그가 본 것을 말한다. 


상영 중인 영화 ‘부활’ 첫 장면이다. 


클라우비스가 ‘증언’하는 부활은 신약성경 4복음서의 내용이다. 


안식일이 지난 일요일 아침, 시신에 향품을 바르러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성들은 빈 무덤을 확인한다. 


그리고 천사를 만나 “그가 말씀대로 살아나셨다. 갈릴리에서 만날 것”(마 28:6∼7)이라는 메시지를 듣는다. 


무서움과 큰 기쁨 속에 떨던 그녀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를 무덤의 동산지기로 오해했다. 그러나 예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랍오니’(선생님)하며 외쳤다. 


예수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났다. 

예루살렘에서 6㎞ 떨어진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에게다. 


그들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눴고 예수와 떡을 먹으면서 눈이 밝아졌다. 

11명의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를 만났다. 


예수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라. 나를 만져보라”고 했다. 


도마는 직접 만져본 뒤에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며 감격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부탁했다. 


베드로에겐 “나를 사랑하느냐”며 세 번이나 물었고 “내 양을 먹이라”고 분부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 외에도 승천 이전까지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였고 친형제인 야고보와 사도바울 등을 만났다(고전 15:4∼8).


오늘날 예수의 부활이 전해진 것은 누군가 증언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구전(口傳)으로, 그리고 성경이 부활을 기록했고 이어 신앙고백과 신조에 담겼다. 

나중엔 기독교 신학으로 확립됐다. 


신약성경은 그런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복음서 기록은 다른 유명인에 대한 기록과 비교해 집필 시기가 매우 이르다.

신약의 기록 연대는 통상 AD 70∼170년으로 잡는다. 


이는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버질의 최고 오래된 기록이 그의 사후(死後) 350년이 지난 것이며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나서야 기록된 것과 비교하면 실감할 수 있다. 


집필 연대가 이르다는 것은 그만큼 특정인을 영웅화할 여지가 줄어든다는 말이기도 하다. 

복음서 저작 연대만 보더라도 마태복음 AD 50∼70년, 마가복음 60년, 누가복음 80년, 요한복음은 50∼85년 사이에 기록됐다. 


더구나 사도바울이 쓴 고린도전서는 복음서보다 더 이른 55년으로, 예수 처형 이후 30년이 채 안 된다. 


부활 사건을 미화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성서고고학이나 신학계에 따르면 현존하는 신약성경 사본만 5500개가 넘으며, 2000여개의 성구집, AD 3∼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125개의 파피루스, 소문자 필기체 그리스어 사본 2600여개 등이 남아 있다. 


고대의 자료가 많다는 것은 부활의 역사적 신빙성도 크다는 것을 말한다.

사도 교부들의 저작도 있다. 


이들은 열두 제자의 제자였거나 그들과 가까웠던 사람들이다. 


1∼2세기에 걸쳐 활동하던 로마의 클레멘트(베드로의 제자), 서머나의 폴리캅(요한의 제자),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책에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스승들의 이야기를 반영했다. 


클레멘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명령과 온전한 확신을 받았다”고 적었다. 


2세기 초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는 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다”고 썼다. 


2∼3세기에는 변증가들이 부활을 증거했다. 변증은 당시 박해받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신앙을 옹호했다. 


순교자 저스틴은 “죽은 자의 부활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왕적인 영광으로 다시 오셔서 새 예루살렘에서 1000년 동안 통치하신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철학자 아테나고라스는 “육체의 부활이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하고 또 인간의 본성이 부활을 요구하기 때문에 부활은 가능하다”고 설파했다. 


변증가들의 설명은 이후 기독교 신학을 조직화하는 토대가 됐다.


초기 신앙고백으로 알려진 로마신조는 AD 170∼180년에 확정됐다. 

로마신조는 세례 요리문답자들을 위한 것으로 교회의 신조로 사용됐다. 


로마신조는 지금의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기초가 됐다. 


사도신경은 이후 세계적인 공의회를 거치며 12세기쯤 서방교회의 공식 신조로 정착했다. 


앞서 니케아공의회(325년)는 “고난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셨다”는 구절을 신조에 포함시켰으며,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년)에서도 “고난 받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는 구절을 재확인했다.


부활 증언은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에서도 이어졌다.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가 부활함으로 죽음의 공포와 죄의 지배에서 자유하게 됐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됐다. 


그분의 부활은 첫 부활로서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밝혔다(2권 16장 13항).

부활 증언은 개신교 신앙 속에 면면히 흘렀다.


20세기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부활은 증거를 아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는 객관적인 역사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세계적 변증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부활의 근본적 기능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활은 예수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하고(롬 1:3∼4) 그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맥그래스는 “부활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이라고 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처음엔 부활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며 달라졌다. 그랬기에 그들은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영화 ‘부활’의 마지막은 클라우비스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반지마저 빼버리고 다시 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그의 표정은 환희와 기대에 차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 20:29·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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