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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국제시장’ 포스터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은 부산 지역이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최근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이 말해주듯 침체됐던 지역에 전국 각지,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지역 교회들도 피란 시절 전국의 신자들이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부산이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고 통일 한국의 길을 예비한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다. 

희망을 꿈꾸는 새해, 숱한 역경을 이겨낸 부산에서 한국교회의 희망을 찾아보았다.

지난달 29일 저녁,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패션거리 중앙광장. 

월요일인데도 거리엔 연인과 가족, 중고생들이 가득했다. 

“와이리 불이 안 들어오노? 쪼매 기다려봐라.” “우 와아∼.” 
오후 6시. 

해가 지자 광장에 설치된 대형 트리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수만 개의 꼬마전구가 빛을 밝혔고 중앙 꼭대기의 육각형 별 모양 장식도 선명했다. 
10∼20m 간격으로 설치된 패션거리 트리에도 빛줄기가 쏟아졌다. 

지난해 11월 말부터 진행 중인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 현장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희망이 있는 곳

이날 부산 지하철 남포역 1번 출구에는 패션거리로 향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형형색색, 휘황찬란한 빛축제는 거리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과도 잘 어울렸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어메이징 그레이스’ 등도 들렸다. 

부산은 전국 최고의 불교 강세 지역. 

광복동이 속한 중구만 해도 170m마다 사찰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교가 강한 곳이다. 
그곳에서 찬송이 들렸다. 

젊은이들은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파크랜드 앞 도로에는 스테인리스 대형 물통 4개가 설치돼 있었고 종이컵을 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5시간을 달였습니다. 차 한 잔 하이소∼.” 
인근 대성교회와 항서교회, 모자이크교회 등 11개 교회 신자들이 참여하는 ‘사랑의 차 나누기’ 행사였다. 

행인들은 쌀쌀한 날씨 탓에 봉사자들이 내미는 둥굴레차 계피차 생강차를 거절하지 않았다. 
한 청년은 “교회가 하나봐”하며 지나갔다. 

외국인 관광객도 줄을 섰다. 

항서교회 조성욱 부목사는 “2000잔을 준비하면 한 시간이면 소진된다”며 “특정 교회를 위한 전도라기보다는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말했다. 

동행한 고신대 이상규(교회사) 교수는 “광복동 거리에 흐르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6·25전쟁 당시 세계 최초의 흑인 성악가 매리언 앤더슨이 종전 두 달 전 부산 남일초교에서 개최한 콘서트를 생각나게 한다”며 “당시 앤더슨은 15만 부산시민을 위로하기 위해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딥 리버(deep river)’ 등 찬송을 불렀다”고 말했다. 

패션거리가 즐비한 광복동은 용두산공원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지명은 광복 이후 동 이름을 개칭하면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에서 광복을 기린다는 뜻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에는 초량왜관이 있던 곳이다. 
인근 부산항과 부산역,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등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관통했다. 


과거, 이북과 이남 사람이 만났던 곳

부산은 피란민의 도시였다. 
1950년 당시 부산 인구는 55만명이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구는 급증했다. 

평안남북도 등 서북지역 주민을 비롯해 이남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향했다. 

이 교수는 “당시 존재하던 부산의 교회들은 피란민으로 가득 차서 예배당도 모자라 사택까지 초만원을 이뤘다”며 “전국 각지의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목회자와 신자들이 몰렸다”고 말했다.

부산 피란민 교회의 역사는 평양교회(현 대청교회)와 함께 시작한다. 
칼빈대 4대 교장을 지낸 고(故) 김윤찬 목사가 설립했다. 

김 목사는 37년 평안남도에서 담임 목회를 시작해1951년 6월 10일, 부산에 첫 피란민 교회를 세웠다. 

이후 채필근 목사와 함께 피란 목회자를 모아 평양노회를 조직했다.

이 노회는 지금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 교단의 평양노회 모체가 됐다. 

교회는 이후 서울 평안교회를 개척했다. 

광복동 대청동 보수동 등에도 피란민 교회들이 속속 세워졌다. 

대성교회(1950) 영도교회(1951) 구덕교회(1951) 모라교회(1951) 양정중앙교회(1951) 연산제일교회(1951) 영도중앙교회(1952) 산성교회(1952) 감만교회(1953) 등이다. 

영락교회도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 대구 제주 등지에 교인들이 집결했다. 

‘피란 영락교회’는 1951년 1월 7일 부산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성도 30여명이 고려신학교에 모였으며, 그날 당회를 열고 “피란 중 교회 당회는 부산에 둔다”고 결의했다. 

그 다음주인 14일부터는 대청동에 있는 ‘새들고아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렸다. 

현 부산영락교회의 시작이다. 

당시 피란 교인 수는 매주 증가해 고아원 앞 정원에 천막을 치고 예배할 정도였다. 
매주 평균 700명이 모였다고 한다. 

교회는 유리방황하는 피란민도 위로했는데 전도대를 조직해 국제시장 등에서 전도했으며, 철도병원에 후송돼온 부상병들을 찾아 위로했다. 

‘평양노회사’에는 1951년 광복교회의 야외예배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오월 첫 주일 보수산에는 100∼150명이 넘는 교인들이 올라왔다. 

사회는 김윤찬 목사가 맡았고 김인서 장로(후에 목사가 됨)가 ‘예루살렘을 생각하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눈물 어리고 목 메인 기도 소리는 평양성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마음, 객고에 시달리고 괴로움에 이지러진 마음, 고향을 그리며 무엇인가 갈급하게 찾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드리는 제단으로 공중에 메아리쳤다. 찬송가는 울음소리로 변했다.”

부산 교회들은 회개와 구국기도에도 앞장섰다. 

교회와 신자들은 전란의 책임이 교회 분열 등 교회에 잘못이 있다고 회개와 자성을 시작했다. 
당시 구국기도회 형태는 두 가지였다. 

피란 성도들의 회개집회와 전란에서 나라를 구해달라는 구국기도회였다. 회개집회는 초량교회가, 구국기도회는 부산중앙교회가 담당했다. 

회개집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과 유사했다. 

온갖 죄악을 고백했고 회개의 눈물이 좌중을 압도했다. 

신자를 버리고 도망 온 죄, 7계(간음)를 범한 죄, 금전상 범죄, 우상숭배 등이 많았다. 

6·25전쟁은 평양 대부흥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북 교회가 부산에서 이남 교회와 만나는 계기가 됐다. 부산장신대 탁지일(교회사) 교수는 “기독교인들이 마지막 피난처였던 부산 지역으로 모이게 됨으로써 부산은 서북교회와 비서북교회가 공존하는 실험장이 됐다”고 말했다.

대청교회 이석호 목사도 “서북 지방을 통해 전수받은 복음의 씨앗과 대동강에서 포로로 잡혀 순교의 길을 걸었던 토마스 목사가 전한 복음의 씨앗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장로교 선교부와의 만남을 통해 만개했고, 이렇게 세워진 교회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쪽 부산에 이식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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