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치하에 교단마다 믿음 저버리고 신앙 굴복
그래도 순교 정신은 곳곳에 남아 명맥을 이어
▲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주기철 목사의 순교
주기철은 1897년 경남 창원군 웅천읍에서 주현성 장로 7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탄생했다. 그는 오산학교를 졸업 후 연희전문상과를 다니던 중에 안질 악화로 귀향했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중생을 체험했다.
1921년 평양 장신 재학 중에 평안도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1926년 30세에 부산초량교회에 청빙을 받았고, 1931년 마산문창교회로 이전하여 부흥사로 명성을 얻었다. 부인을 잃고 마산의신여학교 오정모와 결혼했다.
1936년 그는 송창근 목사 후임으로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다. 1938년 2월 주 목사가 검거되자 교회는 담임 목사 없이 헌당식을 했고,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주 목사는 석방되었다.
주 목사는 1937년 7월 유재기 목사의 ‘농우회’ 사건에 연루해 7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는 감옥에 있을 때 순교를 준비하면서 ‘5종목의 나의 기도’를 하였고 그것을 설교하기도 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義)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1940년 주기철 목사는 다시 체포되었고, 평양노회 노회장 최지화 목사는 평양감옥에 찾아와 주기철 목사에게 목사 사직서를 강요했으나 주 목사는 거절했다.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를 제적하였고, 평양경찰서는 평양노회의 결의를 따라 주 목사 가족과 세간을 끌어내고 교회를 폐쇄하였다.
1944년 4월 21일 오후 9시 “내 영혼의 하나님여 나를 불러주시옵소서”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주기철 목사는 나이 47세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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