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여회 간증 집회, 탈북자 이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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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중순, 제대 2년을 앞둔 어느날 신의주 지휘본부경비대에서 근무하던 여군 이옥(34·국제사랑재단 선교사)은 자신의 고향인 평안북도 구성의 한 동사무소 사무장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이옥 동무 맞습메까?” “아 예, 긴데요.” “거 마음의 준비를 좀 해야갔시오.” “기래 뭔디요?” “요즘 우리 형편 말 안해도 아시갔디요.
이 동무 아부지와 어무이, 금란(언니) 동무를 묻어야 하니 와서 시신을 확인해줘야갔시오.”
한동안 넋을 잃고 말을 잇지 못했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선전선동원으로 호출을 받고 입대한 그는 그저 어려운 형편이지만 가족이 잘 지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부모와 언니가 굶어 죽었다는 거다. 그것도 이미 사흘 전에….
탈북을 결심했다. 이씨는 가족을 묻은 뒤 아사 직전의 남동생 수복(당시 16세)을 들쳐 업고 북쪽으로 달렸다.
먹지 못해 발을 헛디뎌 산을 구르기를 여러 차례.
버려진 강냉이를 먹고 이슬을 받아 마시며 두만강에 이르렀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헤어치며 목숨 건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 2001년 10월 그토록 그리워하던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대북선교단체 모퉁이돌선교회에서 ‘광야의 소리’ 진행자로 활동 중인 이씨와의 인터뷰는 힘들었다.
최근 간증집 ‘하나님이 이끄신 위대한 여정’(프리칭아카데미)을 출간하고부터 더 많은 교회에서 집회 요청이 쇄도해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동안 군부대와 전국 교회에서 900회 이상 집회를 가졌다.
그가 지내온 삶은 곧 하나님이 계획한 위대한 스토리였다.
때문에 간증 집회는 회개와 통곡의 눈물바다를 이뤘다.
과거 북한군 선전선동원에서 지금은 하나님의 선교사로 살고 있는 그는 “음악대 출신의 아버지를 닮아 내게도 음악적 재능이 있는 것 같다”며 “이 달란트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남한에 온 뒤 그는 목포에 정착했다. 그러다 탈북민, 중국 선교에 관심이 많은 서규장(서울 남부교회) 목사로부터 총신대 교회음악과에 입학할 것을 권유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작곡을 공부했다.
그의 소망은 한 가지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 9:3). 오로지 그의 비전은 북한을 향해 있다.
“제 동족의 구원을 위해 머잖아 그들이 부를 수 있을 찬양을 작곡하려고요. 또 북한에 주님의 찬양 사역자를 키울 수 있는 교회음악과를 세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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