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부산 고신대 복음병원에 마련된 고 허순길 목사 빈소 모습(왼쪽). 빈소 벽에는 고인 유언에 따라 부의금과 조화를 사양하고 영정을 설치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지난 10일 부산 고신대 복음병원 장례식장.
신학자 허순길 목사의 빈소에는 이름도 꽃도 부의함도 없었다.
아예 영정조차 없었고, 예배도 없었다.
조문객들은 성경책과 찬송가집만 달랑 놓인 빈소를 보고 당황스러워했다.
고인의 영정 앞에 큰절하지는 않아도 간단히 묵상기도를 하는 건 교회 관습으로 충분히 허락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빈소의 벽에는 ‘장례예식 알림’이란 제목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부의금과 조화를 사양하고 영정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유족들과 위로의 문안을 하는 것으로 상례를 대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족일동.’
그제야 조문객들은 허 목사의 영정이 없는 이유를 납득했다.
유족들은 A4용지 앞뒷면을 가득 채운 안내장을 따로 나눠줬다.
거기엔 고인의 마지막 유작 ‘개혁교회질서 해설-돌트교회 질서 해설’ 중 제64조 장례 부분이 인용돼 있었다.
‘장례는 교회의 일이 아니고 가족의 일이다. 그래서 예배가 아닌 그냥 예식으로 치러야한다. 교회의 장례예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의식으로, 사제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교회장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보통 장례예배 설교나 추모사가 하나님 말씀보다 죽은 자의 공로를 내세우기 십상이고 교회에 해를 끼친다.’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허 목사는 평생 신학과 복음에 정진했고, 500년 전 종교개혁 당시의 개신교도처럼 청빈하고 엄격하게 신앙을 지켰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평생 예비 목회자들을 가르쳤고, 퇴임 후엔 네덜란드 개혁교회 등 다양한 신학적 주제의 저서 집필과 강연을 해왔다.
그야말로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빈소는 그런 고인의 명성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조문객들은 흰색 송이 국화조차 없는 빈소에서 유족에게 목례만 하고 돌아서야 했다.
허 목사는 생전 우리나라 결혼문화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남들에게 자랑하듯 축화와 축전, 축의금으로 도배되는 허례허식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의 큰 아들 성진(56)씨는 아버지의 방침에 따라 10년 전 결혼할 때 축의금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12일 장지로 떠나기 전 열린 발인예식에 참석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이한석 전 총회장은 “팔십 평생 그런 장례식은 처음 봤다. 노숙인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말했다.
죽은 후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 곁에 돌아가는 ‘또 다른 양’에 머물려 했던 고인의 의지를 추모한 것이다.
유족대표인 성진 씨는 조문객들에게 “소중한 신앙 유산을 물려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만 불리어졌고, 고인의 약력 소개나 추모사, 조사는 없었다.
고인의 관은 고급리무진이 아닌 작은 장의차에 실려 장지로 운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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