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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비롯된 ‘세계최초’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의회민주주의가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지구촌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오늘날 의회를 갖고 있고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을 선거로 뽑아 의회로 보낸 뒤엔 자신들의 의견을 국정 대소사에 반영시킨다. 


영국에서 시작된 제도다.


영국이 최초인 것은 그 것 뿐이 아니다. 


항생제 페니실린이 처음 발견된 곳이 영국이요, 팩스와 통조림이 세계최초로 영국에서 탄생했다. 

컨택 렌즈도 영국에서, 우표, 유모차, 연필, 시험관 아기, 탱크, 노동조합이 모두 영국에서 처음 선보이거나 탄생된 것들이다.


의회민주주의 발상지에서 어떻게 지금까지도 절대군주제가 생존해 있을까? 


참 특이한 나라다. 


그래서 의회 민주주의 절차를 통해 뽑아놓은 총리가 있는가 하면 대대손손 왕권을 물려받고 물려주는 여왕도 존재하고 있는 나라. . 그런 영국이 이번에 또 하나의 히트 상품을 출하(?)했다.

이번엔 ‘외로움 장관’이다. 


장관은 장관인데 외로움 장관. . 그러니까 외로움을 전담하는 장관이 탄생한 것이다. 


지구상에서 어느 나라가 내각가운데 국민들의 외로움을 전담하는 외로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기용한 나라가 있는가? 


없다. 처음 있는 일이다.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는 지난달 트레이시 크라우치 현 체육 및 시민사회 장관을 외로움 문제를 담당할 장관으로 겸직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메이 총리는 브리핑에서 “고립감은 많은 현대인들에게 슬픈 현실”이라며 “우리 모두 이 도전에 맞서서 노인과 간병인,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모든 사람들의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외로움에 관한 문제를 놓고 정부차원의 전담위원회가 발족된 것은 지난해 노동당 여성의원이었던 조 콕스가 살해당한 충격에서 출발했다. 


그는 브렉시트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정신질환을 갖고 있던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고 이때 죽은 이의 이름을 따서 ‘조 콕스 고독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 위원회는 외로움에 대한 국가적 대처노력이 필요하다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그 조 콕스 위원회가 고독에 관한 조사 의뢰를 받아 발표한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인 가운데 9백만 명이 때때로, 혹은 항상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단한 숫자였다.


이 위원회는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이나 해롭다고 지적하고 고독은 개인적 불행에서 사회적 전염병으로 확산됐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이 위원회는 또 ‘20만 명에 달하는 노인들이 한 달에 단 한 번도 친구나 친척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자, 영국에서 미국으로 무대를 옮겨 보자. 


외로움이 어디 그 섬나라 뿐 이겠는가? 


한 달에 단 한번도 친구나 친척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노인들이 어디 영국에만 있겠는가? 

우리 주변의 양로원에 가면 대부분의 누워있는 노인들은 병든 육체를 추스르며 외로움과 함께 말없이 누워있다.


사실 외로움이 어디 양로원 울타리 안에만 있을까? 


‘군중속의 고독’이란 말도 있고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류시화의 시도 생각이 난다.

미국의 대학생 4명 가운데 1명꼴로 외로움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도 읽었다.


어찌보면 외로움은 보다 더 원초적이다. 


외로움은 태초에도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가 외롭게 느껴져서 해결방법을 강구하다 찾아낸 결론이 하와였다. 


에덴동산에서도 외로웠던 인간 제1호의 외로움 해결차원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하신 것이다. 


태초에 부부가 있기 전에 태초에 외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외로움에 열외자가 있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때때로 외롭고 그런 외로움은 창조적 에너지로 재활용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24시간 외로우면 그건 병이다. 


그런 외로움을 방치할 때 사회적 전염병으로 확산된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외로움을 신앙생활의 어두운 뒷면에 감춰두려는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교회에서 외로움이나 고독을 잘못 발설했다가는 죽사발이 되는 경우가 많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슨 외로움? 예수 믿는 거 맞어?” 그렇게 들이대면 외로움은 어느새 이단이 되고 불신앙이 되고 만다. 


‘신심부족’, ‘불신마귀’로 외로움을 단죄하기 전에 외로운 이들과 벗하기 위해 다가서려는 애정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LA에 있는 ‘생명의 전화’가 분기별로 전화상담 내역을 공개하곤 한다. 

어느 때건 ‘외로움 호소’가 1등과 2등을 다투는 단골메뉴다. 


우리 이민사회에서 음지로 취급받는 외로움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교회에도 외로움 전담목사, 외로움 전담 장로, 외로움위원회가 창설되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차원에서 고독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장관까지 임명하는 마당에 영혼을 보살피는 교회가 “외로우면 기도하세요”란 말로 면피를 시도하거나 매뉴얼이 없으니 딴동네 가서 알아보라고 기피하고 나선다면 너무 무책임한 처사다. 


교회도 외로움과 전쟁을 선포하고 외로운이들에게 빛으로 다가서야 한다.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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