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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미국으로 이민 올 때 나는 왜 이민가방 속에 꼬깃꼬깃 태극기를 꼬불치고 왔을까? 


이민이란 조국에 배반을 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안한 마음을 달래려고? 


그때를 회상하면서 지금도 가끔 쓴 웃음을 짓는다. 


독립군의 끄나풀로 활약하기 위해 조국을 떠나 만주나 헤이그로 떠나는 투사도 아니고 그 비좁은 이민 가방속에 멸치나 고추장을 더 챙길 일이지 내가 무슨 대단한 애국자라고 태극기씩이나? 


좌우간 그 태극기가 아직도 우리 집 그라지 어느 깊은 구석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래도 불합격 수준의 애국자는 아닌 것 같다.


미국 살면서 태극기를 보고 가슴이 울컥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민 와서 8년 만에 88서울올림픽이 열렸다. 


NBC방송을 타고 대한민국의 모습이 미국 안방을 점령 할 때였다. 


웅장한 올림픽 메인스테디엄이나 잘 사는 서울 거리,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 울창한 숲, 아름다운 농촌풍경, 말끔한 고속도로 휴게실 등이 거침없이 비쳐질 때 마다 나는 하도 흥분이 되어 저녁을 먹다 말고 TV앞에 매달린 적이 여러 번이었다. 


한번도 한국엔 가본 적이 없던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을 향해 “저게 서울이야, 저게 우리나라 태극기야! 저게 바로 아빠가 태어난 나라라고!” 밥 먹다 말고 정신없이 소리치는 아빠 때문에 아이들은 그때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 같다. 


애국가와 함께 태극기가 서서히 올라가는 시상식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그 시절에 어디 나만 그랬을까? 


미국 땅에 살고 있는 모든 한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지구촌의 대잔치 올림픽까지 치러내는 자랑스러운 조국의 모습에 감사했고 주말 한국학교에서 “기억, 니은, 디긋”은 배울지라도 코리아가 도대체 어느 곳에 박혀있는 나라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던 아이들 앞에서도 우쭐해지는 순간이 아니었던가?


강냉이 죽을 받아먹으며 초등학교를 다니던 가난했던 우리나라. . 고기국은 일 년에 설 때와 추석때, 보리밥 도시락에 계란 후라이 하나 넣을 형편이 못돼 겨우 콩자반이 전부이던 그 가난했던 나라에서 세계 선수들을 끌어 모아 당당하게 올림픽을 여는 나라가 되었다니! 


저 시원하게 올라간 서울의 발전상을 보라! 세계로 뻗어가는 코리아의 힘을 보라! 


지구촌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라! 유신시대 서울거리에서 낯설지 않았던 그 구호들이 저절로 입에서 터져 나오지 않았던가?


지금도 미국 TV를 보다가 태극기가 나오기만 하면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이는 버릇은 모든 이민자들이 갖고 있는 태극기 유전자 때문이 아닐까?


골프 채널을 돌리다가 LPGA 한국 낭자들의 이름이 리더보드에 떠오르고 그리고 그 이름옆에 태극기가 보이면 한인들은 흥분하기 마련이다. 


이번 테니스 호주오픈에서 배짱 좋은 우리의 젊은이 정현 선수와 함께 태극기가 TV에 비쳐질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또 얼마나 설레였는가? 


밤 12에 한다는 준결승전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그 시간 TV앞에 대기하고 있던 한인들의 그 조국을 생각하는 뜨거운 가슴을 무엇으로 형용할꼬?


이렇듯 이민자들의 조국사랑은 곧 태극기 사랑이요, 태극기 사랑은 조국사랑이었다. 


한국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선언하며 조국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필라델피아에 살던 서재필 박사님은 한인들과 거리로 나가 퍼레이드를 벌였다. 


그들이 손에 든 것은 태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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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극기가 바로 우리나라요, 대한민국이라고 흔들어댔다. 캘리포니아 중가주의 리들이 인근 다뉴바란 작은 도시에서도 흰옷을 입은 한인여성들과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대한독립을 외치는 퍼레이드를 벌였다.  그들의 손에도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1970년대를 지나 80년대를 맞이하면서 한인들이 모여 사는 곳마다 한인교회가 세워졌다. 대개 미국교회당을 빌려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 하나는 태극기였다. 


그래서 지금도 대부분의 이민교회 예배당 강대상 좌우에는 자랑스럽게 성조기와 태극기가 세워져 있다.


멀리 조국을 떠나 살지라도 이처럼 태극기 사랑이 체질화된 미주 한인들에게 현기증 수준의 놀라운 일들이 작금에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이번 달에 역사적인 평창 겨울올림픽이 열리는데 거기 태극기는 빼고 거시기 다른 걸 들고 개막식에 입장하겠다고? 


한마디로 말문이 막힌다.


옛날 태극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하와이, 캘리포니아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우리 이민선조들이 지금 그 소식을 접하면 무슨 반응을 보이실지 안봐도 비디오다. 


대한민국이란 우리 조국이 태극기까지 포기하면서 장차 추구하려는 세상이 도대체 어떤 세상인지 난 모르겠다.


88올림픽 때 코흘리개였던 아이들이 다 어른이 되었지만 평창올림픽을 핑계 삼아 우리 집에 불러들여 그 옛날 “저게 바로 코리아, 저게 바로 아빠의 나라야!”라고 외치던 때를 재방송 해보려던 계획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평창? 

이젠 별 관심도 없다.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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