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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길 CBS 사장




"아빠 공 잘 잡아요."


아들 지원이가 공을 높이 던졌다.


야구공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바로 내 앞에 떨어졌다.한 손에 글러브를 낀 채 쭈그려 앉아 있던 나는 풀숲에 박힌 야구공을 보느라고 한동안 시선이 땅을 향하고 있었던 듯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는데, 저 멀리 들리는 지원이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아빠, 뭐 하세요? 공 던지세요."

"어, 그래. 잘 받아라."


나는 야구공을 있는 힘껏 던졌다.


너무 멀리 던진 것인지, 털레털레 공을 주우러 가는 지원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일에 쫓겨 아들과 함께 거의 보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아들과 야구공을 던지며 이렇게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건가.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가 될 텐데,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제 만났던 S 방송국의 정PD는 내가 예전의 내가 아님을,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임을 확실히 알려줬다.


얼마전에 정PD와 통화했을때만해도 그다지 다르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자 어쩐지 정PD의 태도가 뚱한 느낌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는 새로 나온 앨범들을 챙겨서 방송국으로 그를 찾아갔다.


"선배 왔어요? 나 바쁜데... 잠깐만요."


본체만체 하면서 나를 어정쩡하게 세워놓고는 다른 일을 하는 정 PD를 보면서 그제야 확연히 알 것 같았다.


나는 더이상 만나고 싶거나 환영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손에 들고 있던 CD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만 아니라면 당장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 천천히 해."


내가 겸연쩍게 한마디를 내뱉자 그제야 미안한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선배, 회사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어, 그래."


나는 기회를 놓칠 새라 들고 있던 CD를 내 보였다.

"이거 얼마 전에 나온 앨범인데 아주 좋아.

들어보고 한 번 틀어 줘."


이 말을 하고 보니 옛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예전에 음악 PD 시절, 내 책상에는 가수와 매니저들이 한 번만 틀어달라고 놓고 간 음반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앨범을 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래도 참 잘대해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절박함을 오늘처럼 깊이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 같았다.


"알겠어요."


정 PD는 심드렁하게 대답할 뿐이었고, 음반은 여전히 본체만체 했다.


'내가 여기까지 내려왔구나.'


나는 비로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나는 음반을 선별해서 틀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꾸로 음반을 틀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되었고, 얼마든지 거절당할 수 있었다.

정 PD 뿐만이 아니었다. 


음반을 들고 PD들을 찾아가면 묵묵부답일 때가 가장 많았고, 귀찮아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런 그들 앞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한번 틀어달라고 부탁에 부탁을 더하고 나서야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럴 경우가 주어질 때마다 나는 옛날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잘 나가는 PD인 나는  뭐 하나 아쉬운 것 없이 누릴수 있는 것을 모두 누렸었다.

내게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그것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가진 지위로 누군가에게 갑의 행세를 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어이없게 을이 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을이었던 그들의 마음을 다시금 헤아려 보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을 중에서도 '슈퍼 을'이 되어 있었고, 이름 없는 회사의 대표일 뿐이었다.

내게는 무슨일에 대해 결정권도 선택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그 손을 잡아주는 이는 드물었고 오히려 돌아오는 건 좌절과 절망이었다.


도와줄만한 사람도 없고 당연하게 누렸던 기득권도 사회적 지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성경이야기속에서, 형들의 샘을 받았던 요셉은 형들에 의해 물이 말라 버린 깊은 우물에 던져진다.

요셉은 물 한방울이 없는 캄캄하고 깊은 우물속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그가 발버둥쳐서 올라갈 수 있는 높이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디안 상인들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요셉을 끌어내고, 그 이후부터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펼쳐진다.


깊은 우물 속의 시간을 허락하신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저 깊은 밑바닥으로 나를 떨어뜨리신 하나님은 결코 버려두지 않으셨고, 그분의 뜻을 따라 연단해 가셨다.


나를 가장 약한 자로 만드사 하나님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할 수 있게 하신 주님께 감사한다.


그 은혜가 내게 족함을 고백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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