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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길 CBS 사장




나는 해가뜨기 전에 일찍 집을 나섰다.


집 근처 호수공원 주변을 걸으면서 불그스름한 여명을 마주보고 싶어서였다.


'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를 통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해가 떴다는 사실을 믿는다.


내가 기독교를 믿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라고 한 C.S. 루이스의 문장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무실의 추위 탓에 겹겹이 겹쳐 입고 검은 털모자를 귀밑까지 눌러 써서 그랬는지 그다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찌르고 걷다보면 산책로에 깔려 있던 무서리가 햇살에 반짝이는 장면이 아름다워 보였다. 발끝을 향한 시선, 잠시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하늘빛은 평화스러웠다.


하나님의 체온을 느끼는 기분이었고, 혼자 반복되는 새벽  산책이 지루하지 않았다.


"주님, 주님, 오, 주님."


간절한 외침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언제쯤 이 곤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주님?'

탄식은 그 한마디로 족했다.


울부짖던 시간도 멈추고, 불평불만으로 가득찼던 심정도 평안으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주님을 찾고 주님께 아뢰는 기도는 믿음의 분량만큼 하게 될 것이다.


성령이 살아가는 힘이었고, 주의 마음인 말씀이 지침이었다. 임재의 경험은 기쁨이었으며, 주님이 드러날 때마다 면류관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마음이 무거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암울하고 대출 빚은 늘어가고 있었다.

이 상황을 주님보다 더 정확히 알고 계시는 분은 없을 것이다.


하루하루 채우시는 은혜 가운데 있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재정의 어려움은 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 나의 마음을 가장 어렵게 했다.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나처 시로다" (시 62:8).

주님앞에 진심을 다해 어려운 마음을 토해 놓고 나면, 짓눌린 어두움이 사라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하루라도 기도를 빠뜨리는 날이면 어둠의 장막이 나를 가리는 것만 같았다.


새벽 산책길에서의 나의 묵상은 하나님과 만나는 훈련이었으며, 침묵이 주는 더 깊은 대화를 경험하게 하셨다.


'살아갈 수 있겠구나'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처럼, 회복하고 치유되는 순간은 하나님을 내 안에서 모시고 섬길 때이다.


감사하는 것, 그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나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었다. 그때 비로소 감사하다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이 주님은 부족한 나를 그렇게 만나주셨다. 지치지도 않으시고 아침이 찾아오듯 위로와 평안으로 다가오셨고, 쓰린 눈물을 닦아주셨다.


감사하면 부끄러웠고, 회개하고 나면 회복되는 경험으로 이어졌다. 행복은 파랑새를 좆는 일이 아니었다.


행복은 나의 내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또한 세상에만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우리집에 교회 식구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하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마다 눈물바다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엎드리는 나의 기도를 받으시고 또 받으셨다.

모임 중에는 더할 수 없는 고난에 빠져있는 이가 있었다.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최연택 기자의 아내 김 집사였다. 갑작스레 남편을 잃고 딸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처지의 그녀 역시 광야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남편 없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그녀는 수입이었던 원고료마저 떼어먹어서 돈 한 푼 못받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 역시 죠이를 창립하고 하루하루 채워 주시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지만, 쌓여 가는 빚더미 속에서 재정의 어려움을 벗어날 길이 막막한 상황이었다.


서로 도울 길 없는 처지였지만, 아는 만큼 중보하고자 하는 마음은 더없이 뜨거웠다. 기도속에 흠뻑 빠져 있다가 보면, 주어진 고난의 몫을 감당하는 힘이 되었다.


함께 중보기도하는 동안에 성령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감동하게 하시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기도했는지 기도를 마칠 때쯤이면 우리들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서로 다른 고통일지라도 그 고통이 고스란히 보일 터였다. 애써 응답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기도후에 부어주시는 평안에 감사하며 그 자리를 지켜 나갔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라'는 주님의 응답이기도 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56:8)

내 눈물방울이 나의 기도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그 눈물을 받아 천국에 있는 눈물단지에 소중히 간직하신다고 했다.

오늘 내가 흘린 눈물을 기억하시는 주님이시기에 오늘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발 앞에 엎드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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