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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길 CBS 사장




침대 머리맡의 알람시계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동안 매일 아침을 깨우던 바로 그 소리였다.


알람 소리를 정지시킨 나는 부스스한 상태로 서둘러 욕실로 갔다.


'아차, 출근할 필요가 없지.'


이제 나는 더 이상 CBS 맨이 아니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제의 선거장면이 다시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욕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었고, 그제야 줌인이 되듯 현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주방쪽에서는 어제와 다름없이 아침상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늘 그랬듯이 도마질 소리가 바삐 또각거렸다.


아내의 움직임에 따라 느리게 식탁에 마주 앉았다.

낙선 소식을 들었을 아내는 한동안 눈물을 보이더니 애써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너무 미안한 나머지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2002년 FM부장으로 재직시 서른 여덟의 나이에 내게 시집 온 아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승승장구한 방송인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큰 아들 지원이는 초등학교 1학년인 8살이었고, 2008년 내가 마흔일곱에 낳은 딸 예서는 돌잔치를 하고 난 지 얼마 안되었을 무렵이었다.


어린 자녀 둘을 두고 실업자가 된 나는 당장 앞일이 막막했다.


오늘은 어떻게 지내야 하는 거지?


머릿속은 온통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아내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깨작거리기만 했다.


그런 아내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앞날에 대한 불안감만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식사를 마친 나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자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행인들이 보였다.


러시아워에 위험천만하게 질주하는 오토바이들, 그들의 삶이 잠시 궁금하기도 했다.

빨간 신호등이 깜빡 거리는 횡단보도 앞에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이래저래 저장된 연락처가 수백개나 되었지만 지금 당장 연락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미련스럽다고 하겠지.


실패할 때를 대비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냐고 말이다.

지금은 누구를 만난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이 자꾸만 귓전을 맴돌았다.


어느덧 발걸음은 교회를 향하고 있었다.


엊그제 주일 예배를 드렸건만 마치 낯선곳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자, 예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이 여기 앉았던 적은 없었다.


차츰 마구 요동치던 마음도 한시름 놓은 듯 편안해졌다.


내게 교회는 유년시절부터 피난처였고, 힘겨운 날에 위로가 되고 힘을 주는 곳이었다.


'잠시 쉬고 싶습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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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날마다 삶에 적용하던 말씀들은 내 삶의 질서를 만들어주었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온통 희뿌옇기만 했다.


무방비 상태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더니, 마침내 흐느끼다가 울부짖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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