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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이와 그의 가족들로 조직된 구세군 최초 밴드.

‘불길 같은 성신여’는 성령 강림을 간절하게 바라는 찬송으로, 부흥회에서 자주 부른다.

이 곡을 작사한 찰스 윌리엄 프라이(Charles William Fry, 1838~1882)는 1838년 5월 30일 영국 윌트셔 주 앨더버리(Alderbury, Wiltshire)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세군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찰스 프라이는 열일곱 살에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예수를 영접하였고, 결혼한 후 온 가족이 구세군에 들어가 찬양으로 주님 일에 쓰임받았다. 

가족 악단을 조직하다 

찰스는 아버지를 따라 건축업에 종사했지만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특별한 레슨을 받지 않아도 악기 연주법이나 악기 구조를 짧은 시간에 습득하여 훌륭하게 연주했다.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피아노, 오르간 등 거의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다. 

교회에서 오케스트라와 밴드 지휘를 도맡아 했고, 솔즈베리(Sailsbury)에 있는 전도단에서 찬양 인도를 도왔다.

결혼한 후 아내와 아들 삼 형제와 함께 가족 밴드를 조직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온 가족이 관악대에서 악기로 합주하기도 하고, 아내가 소프라노를 맡고 찰스와 아이들이 남성 4부를 맡아 합창하면 무척 은혜로웠다. 

삼 형제 역시 음악 감각이 뛰어나서 한 번 들은 곡조는 잊어버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곡조를 바꾸어 연주하거나 악보로 옮길 수 있었다. 

1878년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목사가 이끄는 큰 규모의 전도 집회가 앨더버리에서 열렸다. 

프라이 가족은 구세군 집회에서 찬양하며 집회를 도왔고, 덕분에 집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를 계기로 프라이 가족 악단이 유명해졌고, 여러 교회와 집회에서 프라이 가족을 초청했다. 
이후 프라이 가족은 구세군 노방 전도나 집회가 있을 때마다 관악기 합주 찬양으로 집회를 도왔다. 

구세군 전도단에 들어가다

프라이 가족은 구세군에서 찬양하여 전도하는 일이 매우 기뻤다.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쓰임받는다는 점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생계를 유지하려면 언제까지고 집회에만 참석하여 도와줄 수는 없었다.
찰스는 본업인 건축업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했다. 

전도단에서 충성하는 사이 건축업에 신경 쓸 틈이 없었고 결국 사업은 문을 닫았다. 
찰스는 가족과 함께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 찰스에게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내놓으면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께 자신을 모두 드리는 일이 아깝지 않았고, 주님께 합당한 자가 되고 싶었다. 

결국 1880년 프라이 가족은 온 가족이 생업을 버리고 구세군 전도단에 들어갔다. 
그해 5월 14일 더욱 왕성한 사역을 하고자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생명을 바쳐 찬양하다 

프라이 가족은 구세군에서 최초로 군악대를 만들어서 전도를 극대화했다. 

하지만 쉬지 않고 관악기를 불어서 연주하는 일은 거의 중노동에 가까웠다. 

프라이 가족은 폐가 터질 듯이 아파도, 몸이 산산조각 부서질 듯해도, 숨쉬기가 어려워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마음으로 찬양하였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결국 찰스는 병에 걸려 쓰러졌다. 

찰스는 군악대 연주를 중단하고 구세군 후원자 집에서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몸져 누워있는 상황에서도 조금이라도 건강이 회복되면 당장 거리에서 연주하고 싶었다. 

찰스는 건강만 허락하면 주님께 자신을 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병상에서 찬송시로 표현했다. 

사람들이 이 찬송시를 영국민요에 붙여서 부르며 찬송가 ‘불길 같은 성신여’가 탄생했다. 
가족의 지극한 간호에도 찰스의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1882년 8월 23일 45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짧지만 깊은 감명을 남긴 삶

찰스 프라이가 구세군에 뛰어들어 생명을 바친 지 2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절대 적지 않았다.

찰스가 구세군 최초의 밴드 마스터로 길을 열어, 이후 구세군 노방전도와 부흥집회에서 군악대는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자리를 굳혔다.

 ‘구세군’ 하면 군악대가 떠오를 정도가 되었다.

또 군악대에서 연주하며 틈틈이 찬송가를 만들었다. ‘불길 같은 성신여’를 비롯해 찬송가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을 1881년 12월 29일 구세군 기관지 『전쟁의 함성』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 찬송가는 찰스가 영국에 있을 때 아가서 2장 1절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작사한 작품이다. 

곡조는 윌리엄 헤이스가 가곡을 편곡하여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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