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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욱 <바리톤>


지난 주, 지인으로부터 들은 한마디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제가 일전에 다른 글에서 예민한 몇 명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난리를 치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던 말에 공감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전환되던 시절, 디지털 카메라에 관심가지지 않고, 열심히 장인정신으로 필름만을 고집하며 만드셨던 몇 몇 회사들이 결국 도산하였습니다.
지금은 열심히만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던 세상이 아닙니다. 교회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열심히 찬양하고, 전도한다고 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이 필요하고, 시대의 흐름도 알아야 하고, 심지어 설교도 흐름에 따라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에 있어서 보수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주장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러한 주장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논리를 그들에게 주장하기 보다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C. 성가대의 역할

성가대는 찬양팀과 더불어 교회 예배에 있어서 설교자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처음 찾은 새신자나, 방문자에게 있어 교회의 이미지를 결정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성가대가 음악적으로 부족하거나, 영적으로 부족할 때, 신앙의 깊이가 없는 사람이나 구도자에게 나쁜 영향을 주게 될 것이고, 만일 이들이 신앙을 잃거나 포기하게 되는 이유가 성가대에 조금이라도 있다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성가대의 역할은 선지자의 역할과 제사장의 역할,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필자가 이러한 의견을 제시하였을 때, 어떤 이들은 설교자 혹은 전문적 교육을 받은 사역자에게 선지자, 제사장을 비유하는 것이지, 성가대에게는 과한 표현이 아니냐는 이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들의 의견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성가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자에게 주시는 말씀이라 믿기에 담대히 주장해 본다.
먼저 선지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당신의 백성이나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
성가대는 하나님을 등에 지고 그의 백성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한다.
이 때, 사단 마귀가 물러가며, 병들었던 몸이 치유함을 얻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눈 먼 자가 눈을 뜰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가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신다는(요 14:14) 말씀을 의지한다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마 17:20, 눅 17:6)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조심하라.
지금의 시대는 초대 교회처럼 특별한 은사들이 넘치던 시대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설명하시던 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 때와 같은 특별한 은사들이 온 나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 시대의 선지자는 각자의 교회에서 또, 개인의 삶에서 변화되는 또는 변화된 삶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역할일 것이다.
성가대의 찬양을 듣는 회중에서 갑자기 귀신이 떠나고, 몸에 병이 갑자기 낳는 기이한 하나님의 은혜도 중요하겠지만, 찬양을 듣는 가운데 믿지 못하던 하나님께 좀 더 가까워지고,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교회를 찾았던 사람이 마음을 바꾸고, 비뚤어져 있던 그들의 삶이 조금씩 변화되는 평범해 보이지만, 매 주일 매 시간마다 교회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은사가 성가대를 통해 나타날 수 있다(물론 이 후에 언급할 찬양팀에게서도 동일한 은사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가대는 선지자와 같이 바벨탑을 쌓으며 저들의 오만에 빠져 무너져가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거룩하고 구별된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가대는 제사장의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듯이, 성가대는 교회를 대표해서, 대신해서, 하나님께 영광된 찬양을 올려드려야 한다. 무척이나 중요한 사실은 단순히 주일 공예배에서, 3분에서 5분의 짧은 시간 동안에, 성가대 가운을 입고 제단에서 드리는 찬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습하는 과정과 성가대를 위해 헌신되는 시간들, 그렇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세상 일들을 다 포함하여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또한, 대속죄일에(레 16) 자신의 몸을 순결하게 하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제사장처럼 구별되고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세상에서 지낸 일주일 동안 상처 받고, 고난 받은 심령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과 그러한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성도들 앞에 대표자로 서는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그저 남들보다 노래 잘 한다는 이유로, 이제 교회에 처음 왔으니 다른 성도들과 잘 사귀어 보자는 의미로 성가대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족한 면이 있다. 내가 내 의지로 성가대 자리에 앉아 있다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인가? 아니면 나의 의지로 앉아서 나의 즐거움을 채우기 위해 앉아있는 자리인가?
성가대는 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성가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의 대표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교회를 섬길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성가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대표가 되고 대리인이 된다면, 나의 의견과 나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교회 전체의 의견과 방식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사장은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지 않았다.
오로지 모세 오경에 적혀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방식대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자신을 성결하게 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은 제사장이 순결하지 못하고, 죄에서 자유 하지 못하면 어떻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에 완전하신 예수님이 그 다리가 되어 주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예배에서의 성가대의 역할은 무엇인가?
단지, 예배에 찬양 한 곡을 부르고 내려오는 초대가수 정도의 수준인가? 예배 전체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사역으로 인정해 줄 것인가? 물론, 여기에는 성가대의 실력, 찬양팀과의 역할 분담, 담당 사역자의 능력 정도에 따라 다양한 대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가대의 역할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담임목사이다.
다음 장에서 성가대 문제의 해결방법에 대해 논의 하겠지만, 어느 유능한 지휘자나, 어떤 전문가나, 성가대 자체의 강력한 의지가 있더라도 담임목사의 목회 방향과 결정을 누를 수는 없다.
그렇기에 담임목사의 올바른 교회음악관과 시대를 내다보는 목회의 방향은 그 어떠한 조건들보다 성가대의 역할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교회음악에 대해 전공하며 연구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감히 담임목사들께 청하건대, 교회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을 초대해서, 컨설팅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에 대해 여쭈어보고자 한다.
솔직히, 담임목사들은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영적으로 열려 있는 사람이고, 음악을 전공한 성가대 지휘자는 영적으로 담임목사의 공력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의견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서로 자존심이 있기에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서로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양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중간에서 좋은 해결책을 줄만한 사람을 통해 상담하고 관계 개선을 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담임목사 혹은 교회의 책임자들은 성가대의 역할을 분명히 정해주고, 그들을 격려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가대는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가대가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성가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각과 담임목사의 성가대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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