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곤목사의일생.jpg

 

 

김준곤 목사는 1925년 3월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봉리에서 8남 중 넷째로 출생했다.


영민하고 사색적이었던 그는 15~16세 때쯤 성당 앞을 지나가다가 신부님과 수녀들을 만나게 됐고 성당 안으로 안내되어 ‘예수님 일대기’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김 목사는 생전 TV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이 그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울었고 거의 예수 믿는 사람이 됐다고 회고했다.


1941년 현 무안중학교인 무안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해 1948년에 졸업한 뒤 1951년 9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2년 3월에는 조선대 문학과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광주 숭일 중,고등학교 교장 및 교감을 맡았다.


1950년 10월에는 전쟁 통에서 아버지와 아내가 공산폭도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슬픔을 경험하기도 했다.


1956년 3월부터 7월까지 한성신학교(여수 애양원 나환자 신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1957년 9월에 미국 퓰러신학교에서 약 1년간 연구 수학을 한다.


유학 시절 그는 CCC를 설립한 빌 브라이트 박사를 만나 한국에서도 대학생선교회를 시작하라는 권유를 받고 1958년 10월에 현재의 CCC를 한국에 설립한다.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감나게 표현하며, ‘역사의 강은 어디로 흐르는가’라는 설교 제목처럼 젊은 지성인들의 지적 갈급함까지 채워줬던 것으로 유명하다.


민족 복음화의 비전은 국회에서도 꽃을 피운다. 군사정부 시절인 1966년 3월 김 목사는 국가조찬기도회를 창설했다.


국가조찬기도회가 생긴 것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 시절에 시작됐다.


김 목사는 당시 30여명 정도 됐던 기독교인 국회의원들에게 초청장을 보내 이 기도회를 주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참석했던 국회의원으로는 김종필 전 자민련 대표, 김영삼 전 대통령 등이 있었다.


나라의 장래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며 기도하는 국가조찬기도회는 국제 친선과 기독교 선교에 도움을 주었다.


민족 복음화의 비전은 대학과 국회에 이어 군에까지 퍼져간다.


 김 목사는 1969년 군 복음화운동을 전개한다.


故 박정희 대통령은 군 내 좌익 침투에 대한 우려를 갖고 김준곤 목사에게 군인들의 사상 무장과 정신 무장에 대해 자문을 구해왔다.


이때 김 목사는 신앙 전력화가 군 내 반공운동과 정신력 무장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전군신자화운동을 제안했다.


전군신자화운동은 박 대통령의 흔쾌한 동의로 시작되었고, 그는 6일 동안 중령 이상 중장까지 고급 간부 2,472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전군신자화운동은 현재도 군 복음화를 위한 비전 2020운동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계속>

특집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