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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와 격무, 치열한 경쟁은 현대 직장인의 삼중고다. 

구약성경 전도서 저자는 3000년 전 이 고통을 간파했다.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4:4, 새번역성경) 

흔히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바둑판 위의 361개 교차로에서 우리네 삶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바둑돌 같은 색깔의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은 한 수 한 수 집을 만든다.
 ‘완생(完生)’을 향해서다. 

크리스천 직장인은 그러나 완생이 목표는 아니다. 

그들은 바둑판 너머에 존재하는 ‘영생(永生)’을 추구한다. 

그래서 더 고난이다.

 좁은 길이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처럼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야 할 사람들이다.


◈“야 이 과장, 이젠 좀 마실 때가 되지 않았냐. 교회 다닌다고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회사 상무들을 봐. 그분들은 무엇인가 탁월해서 상무가 된 거야. 말을 잘하든지, 노래를 잘하든지. 그런데 말이야. 상무들에겐 공통점이 있어. 술을 못 마시는 경우는 없거든.”

어젯밤 팀 회식 자리는 힘들었다. 
부장님이 면전에 대고 말했다. 

회식 때마다 상사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나를 이해 못하
겠단다. 

삼겹살이 구워지고 소주잔이 도는 동안 나는 구석에서 사이다를 마셨다. 
팀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 과장, 너 그 사이다, 너만 마셔라. 다른 사람한테 주면 안 된다.” 

입사 8년째. 

상사들은 아직도 나에게 술을 권한다. 

압박은 주기적이다. 

이제 좀 그만하면 좋으련만. 나도 그들 면전에서 말하고 싶다. 

‘부장님, 저는 성실함으로 뭔가 보여드릴게요!’ 

나는 A기업 휴대전화 프로그램개발팀 이원호(35) 과장이다. 

요즘 직장인의 삶과 애환을 담은 드라마 ‘미생’(未生)이 인기라는데 나도 드라마의 주인공 장그래처럼 인턴사원으로 입사했다. 

2006년 말이었다. 
당시 8명의 인턴이 들어와 최종 3명만 뽑혔다. 

인턴 중에 스카이(SKY)대 출신도 많았는데 용케 합격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직장이라 여겼다.

처음엔 개발서비스 운영 부서에서 일하다가 품질 공정 부서를 거쳤다. 
과장은 2년 전 달았다. 

그렇다고 일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해당 분야 지식을 더 갖춰야 하고 업무에 책임을 지게 됐다. 
부담이 커졌다. 

참고로 나는 미생의 오 과장처럼 눈이 뻘겋게 충혈되지 않았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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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업무는 보통 오전 8시30분쯤 시작한다. 

다들 그러겠지만 이메일부터 확인하고 그날 업무 목록 리스트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 
오전 9∼11시는 회사가 권장하는 ‘집중 근무 시간’이다.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 마시는 것도 삼간다.

일터 환경은 자기 업무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 

중간 중간 상사가 시키는 일을 처리해야 하고, 타 부서의 요청이 폭주할 때도 많다. 
요령껏 빨리 처리 못하면 자기 업무는 한없이 뒤처진다. 

내가 속한 팀은 15명이 근무한다. 

팀장 이하 부장과 차장 과장 대리 사원으로 구성돼 있다. 

팀 내에 여성은 4명이다. 차장님 한 분이 육아 휴직 중이다. 

누군가 휴직을 하면 그의 업무는 다른 직원에게 분배된다. 
휴직은 커리어가 단절된다는 점에서 여직원 자신에게도 힘들게 보인다. 

우리 팀의 최근 프로젝트는 휴대전화의 위치기반서비스(LBS) 기술을 활용한 프로그램 개발이다. 
자녀의 위치를 파악해주는 앱의 일종인데 출시를 앞두고 최종 단계에 와 있다. 

정확도와 효과 등을 점검하고 있다. 
그래서 일이 많다. 

6시가 퇴근 시간이지만 요즘은 일주일에 4일은 야근을 한다. 
9시 넘어 끝날 때가 많다. 

게다가 상사가 퇴근을 안 하면 퇴근은 미뤄진다. 

요즘은 상사 눈치 안 보고 퇴근한다고 하지만 아직도 직장인들은 상사 눈치를 본다. 

장그래는 신입이면서 바둑에서 배운 지혜로 팀의 성과를 이루어내는데 실제 신입의 삶은 다르다. 
신입 때는 시키는 일만 한다. 

선임이 던져주는 일이 없으면 멀뚱히 시간만 보낼 때도 있었다. 
그때는 욕도 많이 먹었다. 

“너 바보냐”는 예사이고 “도대체 네가 하는 일은 하나도 못 믿겠다” 식의 폭언도 날아왔다. 
만일 드라마 속 장그래처럼 임원진 앞에서 프레젠테이션(PT)을 할 때 “사무 현장의 전투화를 팔겠다”고 말한다면 “어쩌자는 거냐”는 답변이 돌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윗분들이 굉장히 어렵고 두려웠다. 

주일 저녁만 되면 월요일 출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러다보면 신입 때 가졌던 청운의 꿈은 사라진다. 

점점 회사 생활이 정글로 느껴진다. 

갑자기 미생의 오 과장 대사가 자막처럼 지나간다. 
‘알면서 하니까 실수인 거야. 같은 실수 두 번 하면 실력인 거고.’ 
술 문제는 크리스천 직장인의 최대 고민이다. 

나는 신입 때 술을 권하는 상사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제가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과 약속한 게 있습니다. 그래서 못 마십니다.” 
그 상사는 그냥 껄껄 웃었지만 술 권유는 계속됐다. 

지금도. 회식 자리에서 한 명이 안 마시면 분위기는 깨진다. 

그래서 더 구석에 앉았다. 
선배들은 말한다. 

“술을 안 마시면 다른 걸로 커버해라. 재밌게 놀든지, 노래를 잘 부르든지.” 
감사하게도 상무님 한 분을 알게 됐는데 그는 대학에서 선교단체 활동을 했고 사내 전도와 성경 공부를 이끌고 계셨다.

 요즘은 그분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내가 소모품이라고 느낄 때도 있었다. 

5년 전이었다. 

A형 간염에 걸려 3주를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나는 내가 빠지면 업무에 막대한 지장이 생길 줄 알았다. 
그런데 특별한 연락이 없었다. 

일이 잘 돌아갔다.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내 일이 진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먼지 같은 일을 하다 먼지가 돼버린 듯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칼을 갖고 있으라고. 

신입 시절엔 대기업 10년 생활하면 엄청난 일을 할 것처럼 생각했다. 
기독교인으로서 높은 자리에 올라 선한 영향력을 끼치자고 생각했다. 

이른바 ‘고지론(高地論)’이었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기독교적 영향력이 높아진다는 주장이다. 

내 청운의 꿈은 ‘술 안 마시
는 최초의 상무’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여기저기서 깨지면서 내 능력을 절감했다. 

기독교인이라고 모두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기에 손해를 볼 수 있다. 

내가 있는 자리가 높든지 낮든지 지금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다하는 게 더 현실적이었다. 

교회 목사님은 이를 ‘소명론(召命論)’으로 지칭했다. 
가끔 상사들이 나에게 술을 권할 때 하는 말이 있다. “진짜 업무는 밤에 이루어져. 고급 정보는 술잔에서 나오거든.” 

처음엔 정말 솔깃했다. 

그러나 낮에 수소문하면 정보는 다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말에 일희일비 않기로 했다. 

나는 일기장에 좋아하는 말씀을 적어놓는다. 

자주 읽어보는 잠언이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그나마 새벽기도와 주일예배 말씀은 직장생활의 기초 체력이다. 

하루하루 낙심하지 않고 직장 안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게 기도제목이다. 
그저 우직하게 이 길을 가련다. 

미생이 아니라 완생으로. 그런데, 오늘도 야근이다. 
구내식당 메뉴를 확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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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은(34·여)씨는 도료와 특수코팅제를 생산하는 외국계 회사를 다닌다. 

회사는 몇 년 전 한국의 회사를 인수하면서 한국과 외국의 기업문화가 섞여 있다. 

비교적 자유로운 사내 분위기는 외국식이지만 출근시간 엄수와 술 문화 등은 여전히 한국식이다. 
안씨가 속한 재무팀은 두 달에 한 번 정도 회식을 한다. 

다행히 팀장이 술을 즐기지 않아 맛집 투어가 많다. 
하지만 전체 회식 때는 곤혹스럽다. 

임원들이 술을 마시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술을 피하기 위해 외국계 회사를 택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안씨는 올해로 회사생활 6년 차. 

그동안 두 군데 회사를 거쳤지만 회식문화는 비슷했다. 

그는 “실력을 키워서 전문가가 되려고 하지만 술 권하는 현실은 팍팍하다”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안씨의 고민에 대해 ‘크리스천 직장백서’(두란노)를 쓴 방선기 직장사역연합 대표는 “크리스천 직장인은 하늘나라와 세상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인생과 직장 사역의 바둑을 두는 하나님의 고수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방 대표에 따르면 요즘 직장인들 중에는 ‘비밀 그리스도인’이 많다. 
일명 ‘잠수 크리스천’이다. 

모두 회사 안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비밀 그리스도인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다. 

믿음이 부족해서 할 것 다 하는데 창피하게 예수 믿는 것을 광고하고 다닐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방 대표는 이에 대해 “믿음이 부족하면 어떤가. 

실수해도 괜찮다”면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하면 그 선언 때문에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고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회사 규정까지 어겨가면서 전도하고 기도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방 대표는 “크리스천 직장인 중엔 일종의 얌체짓을 더러 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심해야 한다”며 “손해는 안 보려 하고, 할 일에 빠지는 행위는 결국 하나님만 욕 듣게 한다”고 말했다.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직장문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이 술자리에서 권하는 술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방 대표는 회식 자리를 사역
을 위한 기회의 자리로 만들
라고 주문했다. 

그는 “크리스천 중에는 술자리에 참석해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도 동료들을 위해 이야기 상대가 돼 술자리 정리, 자기 차로 귀가시켜 주기 등을 해주면서 인정받는 경우가 있다”며 “회식 자리에서는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지 말고 대화에 적극 참여해 얘기를 들어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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