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씨와 그의 장인 권신찬씨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기독교복음침례회(유병언구원파)는 1962년 대구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포교에 나섰다. 

당시 대구 공설운동장 맞은편에 있던 유씨의 집을 본거지로 하고 인근의 제일모직 여성 노동자들을 주 대상으로 교리를 전했다. 기도와 예배를 특히 강조한 구원파 교리의 핵심은 ‘죄 사함을 깨달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따르는 이가 늘어나자 유씨와 권씨는 60년대 후반 서울과 인천, 안양 등지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당시 두 사람은 구원받은 성도들 사이의 교제를 강조하며 ‘교제가 곧 기도이자 예배’라는 교리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권씨는 저서 ‘불안에서 평안으로’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69년부터 구원파는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유씨는 71년 서울 약수동 성동교회에서 구원파에 동조한 미국인 선교사 3명과 한국인 목사 2명으로부터 안수를 받아 평신도복음선교회의 목사가 됐다.

이 시기 두 사람은 복음주의방송국(현 극동방송)에서 전통교회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다 쫓겨났고, 유씨는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유씨는 ‘교제의 구심점’인 방송이 사라졌다면서 ‘사업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며 교회’라는 논리를 폈다. 

그는 신자들의 헌금으로 마련한 자금을 이용해 부도 직전의 기계자수 업체 삼우상사를 인수했다. 

또한 아무나 구원받게 할 필요가 없다며 ‘영적산아제한론’을 강조했다. 정동섭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는 “영적산아제한론이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구원을 받게 하는 순서를 정하는 것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보다 의사나 교수, 연예인, 정부고위관계자 등 부유층 인사를 먼저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유씨는 교회 내에 신용협동조합을 운영했으며 그 외에 유람선, 영양식품, 컴퓨터 모니터, 자동차 부품 사업에도 손을 댔고, 제약회사 등 수십여개 업체를 운영했다. 

당시 유씨는 성공한 중소기업 대표로 언론에 자주 소개됐다.

구원파는 또한 영농조합법인 설립을 이유로 전국 도처에 대규모의 땅을 사들였다. 

기독교복음침례회 소속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 만든 환경단체 한국녹색회는 보현산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해 2002년부터 경북 청송에 약890만㎡의 땅을 매입했다. 

유기농법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자연보호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유기농 공동체 추진’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 농사는 거의 짓지 않아 방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송군 기독교연합회는 여러차례 ‘구원파 추방결의대회’를 벌인바 있다.

이 외에도 구원파 관련 영농조합법인은 청초밭영농조합, 일출영농조합, 옥청영농조합, 몽중산다원영농조합, 삼해어촌영어조합, 농업회사법인 호일 등이 있으며 이들이 보유한 토지는 제주 서귀포, 경북 의성·울릉군, 전남 보성·완도·무안, 경기도 안성 등에 분포돼 있다. 

총 규모는 2000만㎡ 이상으로 여의도 면적의 약 7배다. 정동섭 총재는 “국내외에 대규모 토지를 매입한 이유는 집단생활을 하며 말세에 대비 하려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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