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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당신은 너그러이 용서한 적이 언제였나요. 경로석에 앉아 졸고 있는 젊은이를 보고 혀를 차고, 이웃집 노인이 나잇값을 못한다고 조롱하진 않으셨나요.

국민을 외면하는 정치인, 도덕을 저버린 지도자, 방향을 잃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지 않으셨나요. 우리를 분노케 하는 이들을 용서하자고 하면 당장 이런 질문이 되돌아옵니다.

“불의를 용납할 것인가. 정의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렇게 되묻는 당신은 용서가 무엇인지, 화해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용서는 잘못을 용납하자는 것도 아니고, 권력자의 횡포에 눈감자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를 내버려두자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더더구나 정의를 외치고 고발하는 이들을 꾸짖고 나무라는 것이 화해가 될 수도 없습니다.
용서는, 불의와 부도덕을 경험하고 고통 받는 마음에 필요한 약자의 치료제입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칼날에 베이고 피 흘리고 쓰러진 이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화해입니다. 

나 역시 악인의 꾀에 넘어갔다면, 죄인의 길에 들어섰다면,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초대 받았다면 누군가에게 용서 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까요.

파리에 유학을 가서 68혁명을 경험한 캄보디아의 엘리트들이 조국에 돌아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행한 일이 킬링필드였습니다. 

유럽을 천국으로 만들고 싶었던 히틀러는 유대인과 집시와 장애인과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했습니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자는 유대인들의 정의가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충돌해 인류의 성지(聖地)를 전쟁터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인간이 주장하는 정의에 긍휼과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곧 타락이고 지옥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정의가 세워지지 않으면 용서도 이뤄질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90년 전 관동대지진 때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조선인을 학살한 죄가 한 세기 가까이 지난 뒤 다시 밝혀지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고 외치는 정의의 목소리에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도 우리는 서로에게 한두 가지 색깔과 딱지를 붙이며 저주하고 조롱하고 분노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를 정죄하느라 바빠 주기도문은 입술로만 욀 뿐입니다. 이런 우리 또한 긍휼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어떻게 해야 사랑과 정의가 입을 맞출까요. 평화와 진리가 얼싸 안는 장면을 인간의 역사 안에서 볼 수 있을까요. 

지금은 누구도 답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합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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