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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수 음악캠프 고정 출연자이며 경희사이버대학 겸임교수인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가 11월14일 양화진 문화원‘재미있는대중음악 이야기’라는 제하로 강의를 펼쳤다. 

그는“음악이 안 들리면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 없다”며, “그런 삶이 되지 않기 위해 음악 이야기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먼저 우리나라의 콘서트문화를 언급하며, “이제는 응원을 하거나 음반을 사는 시대도 지났고 완벽히 공연시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돈 모아서 음반을 샀다면 지금은 돈을 모아서 페스티벌에 간다”고 밝혔다. 

그는 공연문화의 대표적 인물로 가수 싸이를 꼽으며“우리나라 연예계에서 이제는 광대를 잃어버렸지만 싸이는 다르다. 

싸이를 보면 나 또한 나 자신을 흐트러뜨려야 강의가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싸이는 외모를 보나, 학력으로 보나 A급이 아니고 조연이고 엑스라다. 

그런 친구가 빌보드차트 10위권 안에 2번이나들 정도로 한국문화의 신드롬을 만들었다”며, “싸이는 내 환경, 외모가 어떻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우리에게 증명해주는 인물이다”고 극찬했다. 

이어 그는 가수 조용필에 대한 극찬도 아끼지 않았다. 

“조용필은 50년생이다. 솔직히 할아버지다. 조용필이 이번에 낸 음악은 64세 할아버지가 할 음악이 아니다”고 소개했다. 임진모 평론가는“조용필은 젊은 세대와 소통해 젊은 음악을 했다”고 말했다.

임 평론가는 이어 조용필의 과거를 소개하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이름을 알린 조용필은 자그마치 7년의 무명시절을 지냈다. 그러나 어렵사리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스타덤에 올랐건만 조용필이 1년 만에 대마초에 연루된다”고 말했다. 그는 대마초에 연루된 가수 중 신중현 등을 언급하며,“후에 노력했지만 끝내 대중은 그를 내렸다”고 밝히며, “이 때문에 조용필 또한 감옥에 갔다 와서 심한 좌절을 했다. 그러나 그는 노래로 승부하자는 결심으로 판소리 뿐만 아니라 민요의 달인을 찾아가서 배웠다. ‘내가 노래를 잘하면 대중들은 다시 나를 받아줄 것이다’고 생각한 조용필은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그의 일화를 소개했다.

임 평론가의 따르면, 3년의 공백기 이후 조용필은 라디오 연속극에 기회가 생기고, <창 밖의 여자>를 불러 히트를 친다. 임진모 평론가는“조용필은 자신을알고 바꾸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용필의 음악을 소개하며, 미국음악에 대해 설명했는데 “20세기 대중음악을 자세히 보면 미국음악이다. 
미국은 사실 음악 때문에 승리했다”고 말했다. 

임진모 평론가는“전 세계가 미국음악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은 민주주의를 주장, 어마어마한 인구가 미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중 유태인이 대표적이다. 어마어마한 유태인들이 뉴욕으로 갔다”고 설명했다. 

또한“대규모 농장지대가 형성되어 있는 미국 남부에서는 낮은 임금의 노동력을 찾다가 비싼 백인 대신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썼다. 

흑인을 노예로 쓰며 인권 말살 정책을 벌였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은 오직 아프리카 음악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는“결론적으로 미국에서는유럽에서 온 클래식과 흑인음악이 합쳐진다. 이것이 핵심이다”고 강조했다.

임 평론가에 따르면, 노예생활을 하다 온 남부 흑인들이 노예 해방이 되어 먹고 사는 문제로 북부로 이동한다. 

당시, 동부의 백인들은 서부로 향하고 남부의 흑인들은 북부로 향한 것, 즉 미국의 문화이동이 시작된다. 

임진모 평론가는“미국 사람들은 음악 없이 못 산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프리카는 음악이 오로지 리듬이었다. 도시에 온 흑인들은 기타소리를 접한다. 
이후 리듬 앤 블루스가 탄생했다. 

이는 흑인 음악을 총칭하는 말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임 평론가는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를 소개하며, “테네스주에 살았던 엘비스 프레슬리에게는 흑인문화가 몸으로 들어왔다. 
<크리스찬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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