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용호-01.jpg

방 용호
나파 거주

 

나는 사대주의사상에 익숙해진 한국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이다. 섬김을 받으면서 한 삶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한 내가 교회의 세족(洗足)예식에서 70이된 아내의 발을 씻으면서 표현 할 수 없는 마음의 충격을 받았다.
아내의 두 발을 잡은 순간 가슴이 벅차고 말문이 막혀, 나의 기도는 시작도 못하고 끝이 났다. 유교사회에서 한 세상을 보내신 우리 부모님께서는 이해가 안 되는 엄청난 일이었다.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남은 눈물 없이, 슬퍼할 사연들을 무시하고 냉랭하게 살아오는 내가 왜 이렇게 가슴이 터지고 눈시울이 뜨거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나의 직장 때문에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적도나라에서 1년 열두 달 샌들(Sandal)을 신고 젊은 날들을 모두 보낸 아내의 발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사람들 처럼 내 아내의 발은 샌들과 함께 그 긴 세월 늘 먼지로 덮여있었다. 그것이 아니면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제 비로소 깨달은 수치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내가 처음 경험한 세족식은 나에게 섬김만을 받고 살아오는 지금까지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고, 늦었지만 섬김으로 사는 종의 자세로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품게 했다.
내가 노후생활을 하고 있는 북가주 내파는 포도밭으로 쌓여있는 작은 도시이다.
이곳에는 30년 전에 창설 된 한인이민교회 하나가 있는데, 지난 60년간 여러 대륙과 나라들을 전전 하면서 출석한 교회들과 다른 점이 거위 없다.
우리 부부는 이 교회의 초년생이다. 1990년 은퇴초기 노인학교가 인연이 되여 출석하기 시작했던 상항의 한 이민교회를 찾아가는 운전거리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멀어지면서, 10분 거리에 있는 이웃 시골교회로 옮긴 것이다.
이 마을교회에는 여러 특이한 점이 잇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분기(分期)별로 행하는 성만찬예식에 앞서 진행하는 세족행사이다. 
지난 세족식 때 나는 처음으로 아내의 발을 씻으면서 전에 없었던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 아내로 부터 섬김만 받아온 과거가 너무나 죄송스럽고 염치가 없는 깨달음을 받은 것이다.


 

세족-01.jpg

▲ 서울의 모 대학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에 참여한 대학교수들.

 

십자가의 고난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전에 주님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줌으로 보여준 섬기는 마음을 되살려주는 행사이다.
서로 섬기기를 먼저 하라는 교훈임으로 그 옛날의 예수님제자들처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세족을 행함으로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섬김을 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발을 씻는다는 자세는 남을 받들고 섬기는 마음을 지닌 낮은 자의 수고임으로,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종의 자세로 자기를 낮추지 못하면 발을 씻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섬긴다는 마음은 예수를 닮은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며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보여준 ‘세족정신’은 교만을 불태워 버린 겸손의 자세라고 믿고 있다.
내파교회의 교우들은 한결같이 내가 어린 시절부터 오래 오래 함께 지내온 사람들처럼 낯설지 않은 형제지매들과 비슷하다.
그들은 오늘의 도시사람들과는 달리 소박하며, 서로 챙겨주며 보살피면서 사시던 나의 고향사람들 같다.
아마도 그들은 매해 네 차례나 서로 발을 씻음으로서 그렇게 변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반제도가 자취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영악한 양반의 마음씨가 여전히 곳곳에 만연(蔓延)되어 누구의 섬김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국가와 사회 그리고 이웃으로부터 수고 없이 섬김만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사회는 그 어느 하루도 평화스럽고 조용한 날이 없다.
교회와 같은 공동체에서도 섬김만을 바라는 상전들이 허다하다. 그들은 섬기는 수고 없이 공신(功臣)의 대접만을 바란다. 얻어지는 것이 변변치 않아 성에 못 미치면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요란하게 소동을 부린다.
가정에서도 앉아서 심부름만 시키는 유교사회의 어른들이 있다.
남자로 태여 났다는 이유 하나로 섬김만을 받아온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부끄러움이 없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까지도 남의 섬김에 의존하는 양반은 얌체(Selfish)에 속한 사람들이다.
앉아서 섬김에 의존하는 사람들로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결코 만들 수가 없기에, 우리 모두가 섬기는 인성(人性)을 키워 가야만 한다.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이상적인 기독교문화는 섬기는 자세로서만이 이룩할 수 있기에 예수님이 몸소 보여준 세족사상에 깊게 접목되어야 할 것 같다.
섬기는 사람의 수가 넘쳐서 섬김을 바라는 수를 압도(壓倒)함으로서만이 기독교문화가 우리 사회에 깊이 정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운의 꿈을 지니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업전선에 첫발을 들어 놓는 젊은이들 그리고 백년가약을 맺고 사회로 진입하는 신혼부부에게도 부모형제나 은인의 발을 씻는 세족예식의 기회가 주어져, 섬기는 마음가짐으로 그들의 도전(挑戰, Challenge)이 시작되면 어떨까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문화는 섬기는 마음을 지닌 정치가, 기업가, 과학자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이 만들어 갔으면 한다. 
나도 예수님처럼 그리고 나의 발을 씻어 키워주신 내 어머님같이 발을 씻는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내의 발을 씻을 수 있는 다음 세족행사를 마음에 그려보는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과외공부(2010)의 저자

특집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