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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환 목사

알바니 시온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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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불행이 왜 내게 혹은 그들에게”
지난 3월 11일 일본을 덮친 지진과 해일로 인한 사상자와 실종자 수가  수만명에 이르는 가운데, 훼손된 원자로로 인한 피해까지 겹쳐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위기가 계속될지  그 피해가 얼마나 클지 예상조차 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한계를 넘어선 고통은 사람사이를 갈라 놓았던 장벽을 한 번에 무너뜨림을 보여준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앞다투어 모금과 구호의 손길,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으며, 그러한 움직임들 속에서 사랑은 민족이나 인종, 사상이나 종파를 넘어선 그 무엇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일본 지진에 대한 다양한 해석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기독교 관점으로서의 해석은 실로암 연못 근처에 예루살렘 성벽의 망대가 무너져 무고한 사람들이 죽은 사건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 (누가복음 13:4-5)”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시 지배적이던 바리새파의 인과응보 사상을 엄중히 꾸짖으셨다.
죽은 사람들이 어떤 특별한 죄가 있었기에 벌을 받아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사건은 회개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적 서언일 뿐이라고 분명히 밝히신 것이다.

 

2. “목사님, 왜 믿는 사람일수록 편협할까요?”
그런데 바리새파인들의 인과응보 사상에 젖은 사람들이 이천년 전에만 있는 것 같지 않다. 최근 한국 및 미국의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 지진은 “우상숭배와 무신론,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며 “미신타파의 기회”라는 망언을 쏟아부어 기독교가 다시 한번 여론의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몇몇 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는 하나님의 역할을 대행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지 모르겠다.
몇몇 분들이 단순한 교리에 사로잡혀 현재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읽지 못한 탓이다. 믿는 사람일수록 왜 더 편협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그 “믿는 사람”이 마치 “목사”인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아서 목사인게 죄송한 세상이다.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생명을 최고의 우선 가치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교회들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이나 피조세계의 신음에 귀를 막고 성공과 출세, 성장만이 복음의 본질인 양  선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와 ‘타자’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그들과 우리의 다름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들어 올 수 없는 ‘우리’만의 구원의 방주를 이야기하는 곳이 강대상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여기에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설 자리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교회는 타락했으며, 자신을 낮춤으로 남을 살리는 예수의 정신도 사라지고 말았다……열병에 걸린 이들의 손을 붙잡고 마음 아파 눈물을 글썽이던 소박한 예수의 모습은 실종되고……박해시대에 양을 어깨에 메고 있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콘스탄틴 대제 이후 우주의 주관자인 판토그라토르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대체되고 말았다 (김기석, <길을 사람에게 향한다>, 청림출판사, 101-2쪽)”라는 한국교회에 대한 정확한 진단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예수의 황금률, 다양한 종교의 공존
기독교는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타종교인들을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는 이방신을 섬기는 적대국 앗수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근대의 역사를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나의 적에 대한 폭력은 합리화되고 거룩한 전쟁으로 포장되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유대인을 향한 독일 나찌의 증오, 중동을 테러국가로 간주한 미국의 증오, 미국을 거대한 사탄으로 보는 중동의 증오 속에서 다양성은 존재할 수 없으며, ‘나 아니면 적’이라는 양극성만 남는다 (Joseph L. Allen, <기독교인은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15쪽). 이런 구도 속에서는 한국의 의사인 안중근은 일본에게는 자신들의 영웅인 이또오 히로부미를 죽인 살인자라는 이분법 밖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황금률은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다 (마태복음 7:12).” 내가 존경 받고 싶으면 남을 먼저 존종하라는 단순하지만 자명한 가르침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더 이상 ‘개독교’로 폄하되지 않으려면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는 참상에 대해 편협한 잣대로 하나님의 경고 운운함으로써 그 참사의 의미를 허비하는 일을 멈추어야 할 것이다.

 

4. 수건과 대야
하나님은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 같은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
기독교가 세상을 이해한다면서 내어 놓은 정답들은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안심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어느 신학자 (Stanley Hauerwas)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기기 위해 허리춤에 차셨던 수건과 대야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상적인 상징’이라는 어느 목사의 통찰은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린 기독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영봉, <수건과 대야>, 복 있는 사람). 그것은 복음의 본질로, 권력과 욕망, 성공과 축복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섬김과 자기낮춤의 자세로 다시돌아가는 것이다.
일본이 당한 것과 같은 재난을 볼 때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임하기를 간구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북가주 총연합회 증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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