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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제 목사
(풍성한 새빛교회)

 

<지난호에 이어>
또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영화를 소개한다. “친절한 금자씨” 영화에서도 주인공 ‘이금자’의 불륜의 임신은 용서하지 못하면서 범죄자의 범죄는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님을 표출한다.
힘에 굴복이며 침묵으로 기독교의 면죄부가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인간적 이해관계로 편법 남용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금자씨는 스스로 법위에 군림하는 “메시야”적 존재가 되어서 “신의 폭력”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복수”로 표현이 되었지만, 신의 심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금자씨는 기독교 목사가 주는 “두부”는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로 거절하지만, 자신의 딸에게는 순결한 두부케익을 선물한다.
그녀는 순결한 삶을 지향했던 것이다. 불륜의 여자가 아니였다. 권력을 쥔자들에게 들어간 기독교의 용서의 교리는 이토록 무서운 “면죄부”를 주고 더 큰 권력을 휘두른다.
이것을 귀족종교, 귀족 면죄부라고 한다, 러시아는 귀족종교가 된 예수의 편견적 속죄로 인해, 칼막스의 공산주의 온상이 되었고 서민들을 위한 공산주의는 귀족만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으로 오해하고 러시아 땅에서 몰아낸다.
기독교의 용서의 교리를 잘 못 적용함으로써 권력층에 기생하게 되는 실화가 또 하나 있다. “광주 인화 학교 사건”을 통해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실화“도가니”가 상영되자마자 일주일 만에 백만 관객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 책은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광주 인화학교) 장애인학교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의 전말과 재판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실화에서 크게 두 가지 사실은, ‘장애인들의 처참히 짓밟힌 인권’이고, 또 하나는 ‘그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이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인 원장이 용의자 선상에 오르고, 체포되어 끌려가는 순간에도 그는 신실한 교회장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속죄 받은 신앙인이다.
정의의 사도인 강인호(공유)와 대척점에 위치한 교인들은 법원에서 원장의 무죄를 주장하는 집회를 열고, 금권력을 동원해 피해아동의 부모들을 매수하는 한편, 아수라장의 재판장에서 승리의 찬송가를 부르는 비(非)이성적이고 사악한 무리들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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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한 장면

 

여기서 우리 믿음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한다. ‘보이는 믿음’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리의 믿음이 생활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그 삶에서 믿음의 모습이 보여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거짓된 믿음, 잠자고 있는 믿음을 소유한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도란 이름을 가지고 그토록 흉악한 죄악을 저질렀나? 하는 것이다. 정말 그가 속죄 받은 성도인가? 의문이 생긴다.
속죄 받은 자가 어떻게 그 같은 죄악을 태연히 반복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저지를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가? 만일 그들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야고보서의 룰(rule)을 적용한다면 그들은 믿는다고는 하지만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는, 예수님께 책망 받는 사데 교회와 같이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 와 같은 자의 모습일 것이다(계 3:1).
기독교의 용서는 땅(Properly)이 없는 자들, 빚진 자들에게 전해지던 안식년과 희년의 소식,”아페시스 (빚 탕감)” 였다. 진짜 용서는 프롤레타리아가 브루조아 (bourgeois)의 악행과 만행에 대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proletarian)의 해방 자체를 의미한다. 빚 진자의 해방이다.
예수께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주어 흘린 피로 이루신 속죄의 은총을 브루조아의 악행, 만행으로 인한 양심과 죄책감을 마비시키는 마약, 몰핀의 일종으로 취급하지 말아야한다. 스스로 속죄 받았다는 자가 당착이다.
참으로 속죄 받은 성도는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며 죄 짖지 않기 위해 싸워야하고 [히12: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한 가난한자와 소외된자, 장애자들을 찾아가시던 예수님의 삶을 살아 참된 속죄 자가 되어야 한다.[마25:41-46]”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심판 날에 보혈의 은총을 남용한 거짓 속죄자들을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눅13:26-27). 성경은 말씀한다,[약2:26]”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빌2 :12]”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마5:23-24]“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눅19: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눅17:4]“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즉, 죄지은 사람이 찾아와서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그제야 용서하라 고 말씀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 때문에 사람에게는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
오히려 죄책감을 없이하려고 변명과 남에 탓과 상황화로 자기 합리화하여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고, 쉽게 면죄부를 사용하여 양심에 화인이 깊어간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구원파가 되어가는 기성교회들의 강단에서부터 참된 회개와 행함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
면죄부만 파는 거짓속죄 구원파 영지주의(니골라당)는 구원이 없다.
지금까지 본 저자는 고백의 회개(confess) 와 행위의 죄(debts) 말씀한 것입니다.
단,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첫 회개(Repentance)는 언제든지 기다리고 계신다.[사55: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슥1:3]“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마3: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회개(Return, Repentance)하라 천국(Our Father who art in heaven)이 즉, 하나님이 가까이 오셨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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