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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제 목사
(풍성한 새빛교회)

 

몇 개월 전에 우연히 웹사이트에서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2003년 문화부장관이었던 이창동 씨가 감독을 맡았던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영화배우 전도연 씨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작품이다.
‘밀양’ 이라는 중소 도시를 배경으로 해서 일어나는 유괴사건과 ‘밀양’이라는 지역 이름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감추어진 빛’이 어떤 빛을 의미하는지?  감추어진 빛 속에 숨겨져 있는 어두움은 무엇인지? 관객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다양한 의미와 뜻을 내포한 영화이다.
그중에 종교적으로는 거짓속죄(贖罪)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청준의 단편 소설〈벌레이야기〉가 원작이다.
“밀양” 주인공 ‘신애’ 역을 맡은 ‘전도연’은 33의 나이에,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아들 ‘준’과 함께 이사를 간다, 피아니스트의 꿈도 남자의 사랑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아노 학원을 연다.
예상치 못한 비명의 사건을 접한다. 아들 ‘준’이 웅변학원 원장에게 유괴사건당하여 죽은 시체로 발견됐다! ‘신애’는 아빠를 그리워하던 아들처럼, 죽은 아들이 그리워 울고 또 울고, 가슴에 아들을 묻는다.
가슴이 절여온다, 그래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가슴속 남은 온기를 알알이 파내버리는 그녀는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  남편을 잃고, 남편처럼, 친구처럼 의지하고 사랑이었던 어린 아들마저 잃은 여자!! 자기의 온 생명이었던 아들, 그래서 길에서 집에서 교회와 교도소를 돌아다니며 엉엉 울고 화내고 다니는 여자! 그녀의 웃음도 그녀가 부르는 밝은 찬송가마저도 가슴이 시려 그녀와 함께 눈물 흘리는 자신을 발견케 하는 영화이다.
약국 약사로부터 영원한 빛, 어둠을 거두어 줄 수 있는 빛을 소개받는다. 그 빛이 하나님이시다. 나름대로 신앙이 깊어졌다고 여긴 ‘신애’는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리라! 결심하고, 교도소로 찾아간다.
하지만 교도소에서 범인을 만난 ‘신애’는 경악한다. 기독교로 귀의했다는 범인<웅변학원 원장>이 ‘신애’에게 웃는 얼굴로 “하나님이 이미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고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뻔뻔스럽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신애’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이미 용서했다는 것이다.
충격! 충격! ‘신애’는 그만 정신이 이상해지고 만다. 내 아들을 죽인 원수 같은 살인마!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살인마! 아니 내가 용서하지 못한 그를 도대체 누가 용서했다는 것인가? 아무리 신(神)이라도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그 신(神)이 먼저 용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얼마 후 ‘신애’는 야외 예배를 나온 교인들을 향해 확성기를 들이대고 노래를 틀어 놓는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라는 노래이다. ‘신애’에게 기독교는 거짓이다.
거짓 속죄이다. 거짓 용서이다. ‘신애’는 아들을 잃은 아픔과 죄의식 없이 뻔뻔한 살인자의 얼굴을 보면서 이중 고통으로 망가지는 것이다. 한동안 정신 병원 신세를 진 ‘신애’는 퇴원 후 미용실로 향한다.
머리를 자르고 새롭게 살아가려던 ‘신애’는 미용사를 보는 순간 다시 고통에 빠진다. 어느덧 성장한 범인의 딸이 미용사가 된 것이다.
미용실을 뛰쳐나온 ‘신애’는 집으로 달여와 울면서 마당에서 거울을 들고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카센터 주인이 나타나 거울을 들어 준다.
은총 같은 햇빛이 마당에 쏟아지고 있지만 ‘신애’는 여전히 괴롭다. ‘신애’에게 쏟아지는 햇빛은 여전히 밀양(숨겨진 햇빛)인가? 거울을 들어 주는 순박한 카센터 주인이, 사랑을 외치는 교인들보다 훨씬 훈훈한 휴머니즘을 보여 준다.
밀양(密陽)이란 제목은 참 신비롭다. 영문 제목 ‘secret sunshine‘이다. 도시 밀양의 密은 ‘비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빽빽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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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밀양'의 한 장면

예컨대 ‘밀림’ ‘밀집’에서 쓰는 것처럼 말이다. 곧 밀양은 ‘햇볕이 충만한 땅’이고 영어로는 ‘full of sunshine’ 쯤이 되어야 할 터였다. 그러니 영화를 보면서 ‘햇볕’’ 햇살’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충만한 햇볕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지만 그 빛 속에 빛바랜 거짓된 속죄로 ’신애‘는 그 빛을 거절하고 그 빛을 조롱한다. ’신애‘는 그 교회 장로를 유혹해 성관계를 한다.
물론 성관계를 하면서 ’신애‘는 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고 자신이 가진 분노의 마음을 쏟아 놓는다.<보세요! 보세요! 나는 당신의 빛 앞에서 그 은총의 빛을 받았다는 당신의 신실한 종 교회 장로와 음행을 합니다 > 이후 신앙에 대한 배신감~~ ‘신애’ 는 자신이 기댈 곳을 잃어버리자 정신을 놓아버린다.
아들을 죽인 범인에 대한 분노, 하나님에 대한 분노, 자신에 대한 분노, 남편에 대한 분노, 이러한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현실세계의 문을 닫아버리고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숨는다.
이 영화에서 ‘신애’는 왜 고통당했을까? 용서의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범인이 받은 구속의 은총이 피해를 준 사람의 용서 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획득한 것이 문제다.
그가 진정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싶었다면 먼저 ‘신애’의 용서를 받았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했다. 순서가 바뀌었다. 사람의 용서 없는 하나님의 용서는 무효(無效)이다. 피해를 주었다면 당사자와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람에게 잘못해 놓고, 그 사람은 무시한 채 하나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종교가 있다면 누가 그런 종교를 진정한 종교로 인정 하겠는가? 혹 그런 복음이 있다면 미신이다.
가짜복음이다. 그렇다면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기독교는 그렇게 저급한 종교인가? 그렇지 않다.
영화에 묘사된 종교는 왜곡된 모습일 뿐 건강한 기독교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내가 만든 하나님 ? “하나님이 울고 계신다”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으며 구원 받은 줄 착각하는 구원파 교회와, 구원파의 거짓속죄가 만연되어가는 기성 교회강단과 교인들은 각성해야한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앞에 서기 전(前)에 먼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한다.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하면 여호와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1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의 기간을 ‘두려운 날들(야밈 노라임)’이라 부르며 사람과 여호와로 부터 용서받는 절기로 지킨다.
지난 일 년 동안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고 1월 1일부터 9일까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마지막 10일에는 여호와께 용서를 구한다. 왜 사람에게는 9일을, 여호와에게는 하루를 할애했을까? 하나님은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있는 그 자리에서 용서를 구할 수 있으나, 사람에게는 전화하고 약속하고 찾아가는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사람은 거절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는 꼬일 이유가 없으나, 사람과는 늘 꼬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과 문제가 생겼는가? 먼저 사람을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 다음에 찾는 것이 순서다.
왜 기독교인들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성도와 이웃들과 쉽게 불화하고 죄를 짓고 하는가? 하나님께만 죄를 용서받으면 된다는 잘못된 구원파 신앙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사람과 이웃에게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하는 복음의 진리를 안다면 조심스럽게 언행(言行)하는 거룩한 삶을 살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살며 죄를 쉽게 짖고 예수 이름만 불러 용서받는 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 이웃에게 용서를 받고 난 후에 내가 너를 용서하신 다는 고’ 주기도문에서 말씀한다. [마6: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이웃에게 용서 받지 않고 하나님께 속죄 받았다는 것은 양심의 화인일 뿐이다.
속죄의 은총이 마약의 일종이 되어 죄책의식 없이 또 쉽게 죄를 짓는 것이다. 거짓 속죄이다. 속죄를 남용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안티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향해 비난하는 실례로~~교인들이 술에 취하고[고전6:10]“술 취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술좌석에서 음담패설(淫談悖說), Motel에서 음란하고, Motel 옆 Church 가서 예수피로 속죄 받고, 예배와 봉사로 의기양양(意氣揚揚)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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